▲ 고려청자(왼쪽사진)와 조선백자철사포도문호 |
일본 침략군은 조선도공들을 끌어가 사무라이(武士) 대우를 하면서 자기를 굽게 했고 오늘에 와선 도신(陶神)으로 떠받드는 형편이다. 이 전쟁은 도요토미(豊臣秀吉)의 광적인 침략근성에서 나왔음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는 전국시대를 마감하한 영웅이지만 우리에겐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1590년 천하를 통일한 히데요시는 간바쿠(關白)자리를 양자 히데즈쿠(秀次)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다이고우(太閤) 자리에 올라 야망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전쟁광인 그는 더 나아가 동북아 정벌이라는 가공할 작전을 세우는데 거기에는 까닭이 있었다.
천하를 통일했다지만 곳곳에 불만세력이 준동하자 이의 견제를 위해 또 다시 전쟁을 서둘렀던 것이다. 그는 대륙(명나라)을 치려면 먼저 조선을 제압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렇듯 전쟁수순을 밟아 가는데 그 대상을 조선으로 삼고 <대마도>도주를 내세워 조선과 협상을 꾀했다. 여기서 명분을 내건 것이다.
명나라를 정복하려면 조선을 거칠 수밖에 없으니 길을 비켜달라고 협박을 하고 나섰다. 우리 조정에선 연일 머리를 맞대고 논의했으나 길을 비켜준다는 건 무혈입성(無血入城)과 다를 게 없으니 그럴 수 없다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하지만 당시 조선의 국방력은 보잘 것 없는 수준이었다.
이것을 히데요시는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우리 조정은 궁여책으로 수신사를 보내 히데요시의 의중을 타진하기로 작정했다. 세칭 <조선통신사>의 방일행차가 그것이다.
▲ 조선통신사의 방일
조선왕조는 이때 난감한 처지에 놓일수밖에 없었다. 조선과 명나라는 그런대로 우호를 누릴 때였고 비록 조공은 바쳤지만 명나라는 조선에 대해 이렇다 할 강압은 가하지 않았다. 그러니 왜군에게 길을 비켜 준다는 건 의리에 반하는 일이었고 이를 정면으로 반대하면 왜국을 자극하는 꼴이 되어 난감한 처지에 놓여버렸다.
조정에선 오랜 궁리 끝에 교린수신사(통신사)를 보내기로 했다. 선조 23년 (1590) 보빙(報聘)이라는 명분 아래 황윤길을 정사, 김성일 부사, 허성을 서장관(書狀官), 여타 수행원을 통신사로 보냈다. 다음해(1591) 음력 3월 통신사 편에 보내온 히데요시 답서에는 정명가도(征明假道)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이렇듯 침략의도가 분명한데도 우리 사신들의 보고는 일치하지 않았다. 정사 황윤길은 <반듯이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 반면 부사 김성일은 <특이한 정황이 없는데도 황윤길의 장황한 보고를 해서 민심을 동요 시킨다>고 맞섰다.
조신(朝臣) 간에 의견이 갈리자 동(東)인 허신이 황윤길의 입장을 옹호했으나 당시 조정세력의 중심에 있던 김성일(동인)의 주장에 동조한 것이다. 이 무렵 또 한 가지 웃지 못 할 야사(野史)가 전해온다. 그들 통신사 중에는 사주관상에 능한 자들이 있어 <도요토미>의 관상을 보고 침공여부를 예단했다는 풍문이 그것이다.
관상을 본 자의 말도 두 갈래로 갈렸다. 한편에선 도요토미 골상을 원숭이로 보았고 또 다른 수행원은 독사(뱀)상이라 했다. 그러니 원숭이나 <뱀>은 바닷물을 싫어하기 때문에 거친 물살(현해탄)을 건너오지 못할 것이라 주장했다. 참으로 어이없는 풍문이다. 이렇듯 우왕좌왕하는 사이 왜군은 부산에 상륙, 파죽지세로 이 땅을 짓밟기 시작했다.
두 차례의 침략에 선조는 왕궁과 백성을 버리고 북방으로 쫓기는 신세가 되었으나 의병과 이순신이 몸을 던져 나라를 지켜냈다는 건 알려진 사실이다. 거듭 말해서 임진란은 왜국이 한반도 선진문물을 약탈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이었다. 그래서 왜병들은 도공이외에 금공(金工), 목공(木工), 석공(石工) 세공품의 장인(기술자) 등을 개 몰이 하듯 끌어갔다.
▲ 일, 상류층은 도자기광(狂)
대체로 일인들은 서화(書畵)보다 도자기를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역사성 탓이라 보아야 한다. 중국과 한국 등 한자문화권에선 서화(書畵)를 중시하는 편이지만 일인들의 도자기 취향은 가히 광적이라 하겠다. 그래서 임진란 때 왜병들은 조선도공을 닥치는 대로 끌어간 것이다.
여기서 400여명의 도공을 놓고 영주들은 전리품 손에 넣으려 혈안이 되어 있었다. 도공들은 이어 가마(요)설치를 강요받았다. 이때 7개 도요가 생기는데 아리타(有田), 사츠마(薩摩), 다카토리(高取), 하기(萩), 가라스(唐津) 등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도공들은 끝내 귀환을 못한 채 400여년간 그곳에 눌러앉아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이중 대표적인 가마로는 <아리타>와 <사츠마>가 있는데 아리타요는 공주 계룡산 학봉리에서 잡혀간 이참평(李參平)과 사츠마의 심당길(沈堂吉)은 전라도 남원성 함락 때 잡혀간 장본인이다. 이 두 가마(窯)는 지금도 일본 도요의 양대 축(軸)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이참평과 심당길은 각기 다른 삶을 살아온 도공이었다. 심씨가 일군 <사츠마>요에선 장식품 성격(예술)의 자기를 굽고 <아리타>는 시발부터 실용성에 무게를 둔 소위 왜기(倭器)를 양산해낸 것이다. 어떻든 조선도자기 앞에 영주(大名)나 거상(巨商)들은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거기에는 피처럼 아픈 역사적 배경이 도사리고 있다. 임진란 이전, 일본엔 변변한 식기(밥사발, 찻잔) 같은 게 없어 표주박 같은 목기를 이용하거나 왕대 마디를 잘라 밥그릇으로 삼았다. 어쩌다 중국자기나 조선의 사발을 손에 넣으면 그것은 신분의 상승을 뜻하는 일이었다.
그때 조선 찻잔이나 도자기에 센노리큐(千の利休) 보증서만 붙으면 일개 성(城)과 천금을 아끼지 않고 손에 넣으려 눈에 불을 켰다. 그럼 <센노리큐>란 누구인가? 그는 승려였다. <히데요시>의 다도(茶道) 스승으로 <무사도가 죽음을 미화(美化)시키는 것이라면 다도는 승화(昇華)된 삶의 경지>라고 설파한 다도의 선각자이기도 했다.
그는 또 와비차(わび茶)정신을 선양함에 있어 조선의 사발을 선택했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다. 여기서 <히데요시>는 자기를 구어 낼 도공이 왜국엔 없다 해서 조선도공을 수백 명이나 끌어간 것이다. 임진란을 도자기 전쟁이라 부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 세계적인 도공 심수관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도공들은 그곳 영주 휘하에서 가마(窯)를 일구게 되는데 아리타(有田)와 사츠마(薩摩)가 대표적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아리타의 개조(開祖) 이참평은 일본교과서에 줄곧 실렸으며 도신(陶神)이라 받들며 신사에 모셨다. 일본 명(名)으로는 <가키우에몽(枾右衛門)>으로 통한다.
반면 <사츠마>의 심당길(沈堂吉) 일가는 이와는 달리 15대까지 창씨를 거부하고 청송심씨(靑松沈氏) 혈통을 고집스럽게 지켜온 가문이다. 12대부터 심수관(沈壽官)으로 습명하고 있는 도공열전…. 12대 심수관 도요를 필자가 찾아간 것은 지난 1976년 늦가을로 기억한다. 지방지에서 <사츠마요>를 다룬 것은 아마도 필자가 처음이 아닌가싶다.
그때 일이 지금도 필름처럼 눈앞을 스쳐 가는데 필자는 그 후 심수관을 몇 차례 만난 일이 있다. 사츠마 도요에 대해 30여년간 필자는 나름대로 추적해온 셈이다. 취재와 탐사명목을 내세워 90여차례 방일을 했으니 광적으로 매달린 셈이다. 조선도공들의 발자취와 애환을 취재하다보니 거기에는 눈물겨운 사연과 웃지 못 할 일화가 도사리고 있었다.
일본 지식층의 설명을 경청도 했고 일본 서적, 문예춘추(잡지)를 입수, 그 발자취를 추적해보았다. 그 바람에 월급날 빈 봉투를 거머쥐기 일쑤였고 그러다보니 가족들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일각에선 <기자정신이 투철한 사람….> 운운했지만 대부분 <미쳤어. 시키지도 않는 일에 매달려 가족 희생시키는 마개 빠진 사람!>이라는 비난이 뒤따랐다.
일본을 파고들어 무엇을 어떻게 하겠느냐는 손가락질을 받아온 세월이었다. 76년 <심수관 도요>를 취재하고 난 후 다음 다음해였던가? 한.일 친선 도쿄대회 때 그를 만난 일이 있고 한 번은 그가 서울(이천)나들이 때 유성호텔에 투숙, 필자를 찾은 일이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때 필자는 프랑스(파리) 취재에 나가 자리를 비워 상봉을 못했다.
또 85년으로 기억한다. 필자가 근무하는 신문사에 버스 한 대가 들이닥쳤는데
그들 일행은 다음날 남원(조상이 잡혀간)과 청송-서울을 거쳐 후쿠오카를 향해 돔보(비행기)편을 이용한다고 했다. 앞으로 필자는 1년간 <일본 도요(陶窯)산책>이라는 테마를 갖고 이야기를 끌고 갈 생각이다. 전편은 <심수관요>와 후편은 <아리타>의 <이참평>을 다룰 계획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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