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시청의 변화를 지켜봤던 그를 만나 과거 시청 공무원 시절의 공직 생활을 물어봤다. 지난 13일 대전시청 20층 ‘하늘 마당’에서 만난 김 씨는 사무실 집기류가 쌓여 있던 이곳에 커피숍과 휴식공간이 만들어진 것을 보고 놀라는 눈치였다.
▲ 김석기 회장(가운데)이 대전시청 공무원배구단 옛 동료들과 오랜만에 만나 대화를 나누고 있다. 김 씨는 퇴직하기 전 시청 배구단장을 지냈다. |
▲ 당시는 구청이 아니라 출장소라는 이름으로 동구와 중구 두 곳이 있었다. 인동, 원동 등지에 주민들이 있었지 지금의 둔산동이나 오류동, 오정동은 모두 채소밭이었다. 또 대전역에서 충남도청까지 도로는 지금과 같은 모습이지만 당시에는 무척 넓고 큰 도로처럼 보였다. 당시 받았던 월급이 3400원이었다. 3000원하는 하숙비를 동료와 나눠내고 나머지로 근근이 생활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모든 국민이 어려운 시기였지만 공무원 근무환경도 지금과 많이 달랐을 것 같은 데.
▲제가 공직생활 시작하던 때는 승용차나 오토바이 같은 교통수단이 없어 출장을 갈 때 자전거를 이용하거나 걸어다니는 게 전부였다. 중구 대흥동에 시청이 있을 때 수침교까지 나와 노력봉사를 하고 사무실에 들어가면 오후 2시가 넘어야 했다. 지금은 30분이면 오갈 수 있다. 또 복사나 프린트라는 용어 자체가 없던 시절이었다. 당시는 손으로 베껴 쓰거나 철판을 강한 쇠로 눌러 여러 장을 찍어내는 게 전부였다.
-대전시청사가 지난 1971년에 현재 중구청 자리인 대흥동 청사 시대를 맞았고 1999년에는 지금의 둔산동 청사를 열었다. 시대흐름에 따라 공직 내부 변화는 어떠했는 지?
▲1978년 대흥동 시청사를 사용할 때 시정과에 근무했었다. 당시에는 담당 계장을 아버지, 차석을 어머니라고 부를 정도로 공무원 사이에 위계질서가 뚜렷했다. 감히 계장에게 직접 말하지 못하고 차석에게 전달한 후에야 차석이 계장에게 의사를 전달하는 방식이었다. 또 강압적인 분위기도 있어 언제까지 끝내라는 일은 밤을 새워서라도 마치고 가야지 그렇지 않으면 학교에서 혼나듯 꾸중을 듣는 게 당연한 분위기였다. 반면 1999년 둔산 청사로 옮겨올 때쯤엔 조직 내 분위기가 많이 부드러워졌다. 또 분업화가 잘돼 있어 조직이 움직이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1999년 현재의 둔산청사를 신축해 옮겨올 때 청사가 너무 화려하다는 말이 많았는데.
▲21층 규모의 둔산 신청사로 이전할 때는 IMF 경제위기가 터지고 몇 해가 지나지 않은 때여서 경제도 어려운 데 너무 화려한 청사를 지어 위화감을 조성한다는 지적이 많았다. 그래서 대흥동 청사에서 사무기기를 옮겨올 때 이삿짐 차 한두 대씩 조용히 옮길 정도였다. 지금은 대전시의 위상이 높아진 만큼 청사 역시 그를 반영한다고 본다. 당시 시청사 부지와 관련해 원래 청사 부지는 현재 예술의 전당자리로 지으려 했다. 하지만 그당시 이봉학 시장이 이상희 토지개발공사 사장을 찾아가 대전의 중심에 대전시청이 위치해야지 조금이라도 외곽지역으로 벗어나선 안 된다고 설득해 공군교육사령부와 비행장 터였던 이곳에 들어서게 됐다. 또 보라매공원 역시 이곳이 공군비행장이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자 공군의 상징인 보라매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후배 공무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요즘에는 ‘어찌하오리까’로 시작하는 보고가 많다고 한다. 사안이 있을 때 담당부서 책임자가 결정하지 못하고 하나 하나 시장에게 물어보고 허락을 받은 후에 행정에 옮긴다는 말이다. 이래서는 행정이 살아날 수 없다. 필요한 부분은 책임자가 고민해 결정한 후 사후보고 형식을 취하면 된다.
처음부터 물어보고 행동하는 것은 잘못됐을 때 책임을 피하려는 뿌리깊은 습관에서 시작한 것이다. 간부공무원이 됐으면 자기 업무는 결정을 내릴 줄 알아야 한다. /임병안 기자 victoryl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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