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교통.국제여론 형성 '유리'... 독립활동 요충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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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 90주년]승리의 역사를 가다 임시정부 왜 상하이였나

  • 승인 2009-11-26 10:07
  • 신문게재 2009-03-13 13면
  • 상하이=맹창호 기자상하이=맹창호 기자
1919년 3월 12일 오후 10시를 넘긴 야심한 밤. 상해 프랑스조계 바오창루(寶昌路) 허름한 셋집에는 때아닌 방문객들로 성시를 이룬다. 본국과 일본, 만주, 러시아, 멀리 미국에서까지 그 이름만으로도 쟁쟁한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의 감시망을 뚫고 모여든다.

본국에서는 민족대표33인을 대신해 손정도, 최창식, 현순 등, 일본에서는 최근우와 이광수 등, 만주와 연해주에서는 이동녕, 이시영, 신채호, 조상환, 조소앙 등, 미국에서는 여운홍 등, 상해에서는 김철, 신석우, 여운형 등이 각각 대표로 참여한다.

회의는 한달 가까이 치열한 토론을 거치며 지루할 정도로 이어진다. 이어 부산의 윤현진 등이 추가로 참여하고 각도(道) 대표들이 선출된다. 마침내 4월10일 오후 10시, 29인의 대표가 임시의정원 구성이 합의한다. 의장에는 이동녕, 부의장에 손정도가 선출된다.

회의는 탄력을 받아 일사천리로 밤새 이어진다. 임시정부의 국호는 대한민국으로 정해졌다. 연속성 차원에서 대한제국의‘대한’을 받아들이지만 군주제를 폐기하고 민주공화제를 채택키로 한다. 우리역사 최초의 민주공화정부다.


임시의정원은 이승만 국무총리를 수반으로 안창호 내무, 김규식 외무, 최재형 재무, 이시영 법무, 이동휘 군무, 문창범 교통 등 6부의 국무원 총장을 선출한다. 1919년 4월11일 역사적인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드디어 공식으로 출범했다. 3월1일 독립을 선언한 전국민의 위임을 받아 국토광복을 밝히고 최후의 1인까지 싸울 것을 선서한다.

임시정부는 수립과 함께 각지에서 진행되던 독립과 광복투쟁을 영도했고 그 결과 놀라운 성과를 속속 이루게 된다. 이때부터 임시정부는 일제가 항복한 1945년까지 우리민족의 유일한 정부로 활동한다.

▲임시정부 왜 필요했나

3.1 운동은 독립의 민족적 각성과 요구를 민중들에게 확산시킨다. 민족지도자들은 더욱 조직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일제와 조선총독부에 맞설 정부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이 종말을 고하고 프랑스 파리에서는 만국강화회의가 열리자 상하이의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외교적 해결에 큰 기대를 걸게 된다. 이때 민족자결을 주창한 미국 월슨 대통령의 특사 크레인이 상하이에 도착한다. 그를 면담한 여운형은 파리강화회의에 우리대표단의 참여와 지지를 요청해 협조약속을 받아낸다. 독립운동가들은 크게 고무됐다. 월슨대통령에게는 별도로 독립지지를 요청하는 진정서를 제출한다.

하지만 세계 각국대표가 참석하는 국제회의에 개인의 진정서가 제출될 수 없었다. 상하이 독립운동가들은 1918년 8월 급히‘신한청년단’을 만들데 이어 1919년 2월 1일 김규식을 전권대사로 한국독립을 청원한다. 상하이 독립운동가들은 본국과 세계각지로 파견된다. 여운형은 러시아에, 장덕수와 이광수는 일본에, 선우혁 등을 국내에 잠입해 독립자금마련과 지역별연락체계를 구축한다.

드디어 전 민족이 떨쳐 일어선 3.1항쟁은 시작됐고, 독립선언에 따라 민족적 지지를 얻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탄생한다. 구미위원회는 이승만을 중심으로 적극적인 외교활동을 전개한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세계질서의 냉혹한 현실. 청원과 외교만으로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애국지사들의 생각은 순진했다. 임시정부를 통해 의열투쟁에 이어 본격적인 독립전쟁이 준비된다.

▲상하이 임시정부로의 통합

3.1운동 이후 형식과 규모를 갖춘 국내외 임시정부는 한성(서울), 상하이, 러시아 등 모두 3곳이다. 조신민국임시정부, 고려공화국, 간도임시정부, 신한민국정부, 대한민간정부(천도교) 등이 각종 정부성명을 사용했지만 선언성격의 이른바‘전단정부’에 불과했다.

임시정부를 가장 먼저 선언한 것은 러시아의 대한국민회의였다. 조선은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국경을 정해 월경을 엄했지만 1864년 대기근 이후 간도의 황무지가 개척된다. 러시아지역도 1919년 50만 명이 넘는 동포들이 거주한다.

의병투쟁부터 경술국치에 독립지사들의 러시아 망명도 크게 늘었다. 1917년 전로한족회중앙총회가 수립됐고 1919년 3월17일 각계각층 대표를 위원으로 대한국민회의로 개편한다. 이른바‘노령정부(露領政府)’가 만들어졌다.

4월11일 상하이 임시정부에 이어 4월23일 서울에서는‘한성정부’가 수립된다. 한성정부는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16일부터 서울 내수동에서 임정수립준비위원회를 만들어진다. 4월 2일에는 인천 만국공원에서 13도대표자대회가 23일 국민대회를 개최한다. 한성정부는 국내에서 수립됐고, 국민대회라는 국민적 절차에 의해 수립된다.

한성정부는 하지만 집정관총재를 비롯한 부처별 총장과 차장에 국내인사를 단 한명도 배정하지 않는다. 일제의 탄압으로 외국에서만 공개활동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수립과정에서 이미 3월 하순부터 상하이로 대표들이 빠져나온다.

이렇게 만들어진 3개의 임시정부는 헌법개정과 정부개조로 통합된다. 국호는 상하이정부로, 각료구성은 한성정부를 따른다. 노령정부의 대표격인 이동휘는 국무총리에 선임된다. 상하이 임시정부는 정치적 통일을 대내외에 보이고자 한성정부 각원을 표준으로 하자는 통합작업을 추진한다. 상하이 임시정부는 노령정부와 한성정부를 포용한 8장 58조의 대한민국임시헌법을 만들어 정치적 통일을 이루고 대통령 중심제가 가미된 의원 내각제로 개편된다.

▲왜 상하이 임시정부였나

신해혁명에 참가한 신규식은 상하이 프랑스조계에서 독립운동가와 유학생들을 규합, 1912년 동제사를 조직한다. 동제사는 임시정부의 중요한 토대가 됐다. 상하이에는 한국인 이주민이 1910년 89명에 불과했지만 1917년 300여명, 1919년 이후 1000명으로 급증한다. 상인과 유학생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독립운동 관련자였다.

당시 상하이 임시정부는 어느 지역보다 유리했다. 독립전쟁의 근거지와 활동무대인 만주는 정부를 두기에 일본군과 너무 근접했다. 러시아는 대혁명과 일본과의 전쟁 등으로 임시정부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미국은 너무 멀었다.

반면 상하이는 서구열강에 개항된 국제도시로 동서교통의 요충지였다. 세계여론을 형성하기에도 유리했다. 황포탄 부두를 중심으로 영국과 프랑스, 독일 등 세계열강의 치외법권조계지가 있어 상대적으로 자유로왔다. 그 가운데 정치적 자유를 전통으로 하는 프랑스 조계는 정치망명객의 도피처로 안성맞춤이었다.

경무부장시절 김구는“프랑스 조계당국은 우리 독립운동에 대해 특별히 동정적이었다”며“그런 까닭에 일본 영사가 우리 독립운동자의 체포를 요구할 때, 프랑스 당국은 미리 임시정부에 통지하고…”라며 당시를 회고했다. 한국독립을 지지한 쑨원(孫文)정부의 지원을 받기도 쉬웠다.

본국과는 안동(단둥)을 통해 기선으로 연결돼 비교적 빠른시간에 왕래가 가능했다. 많은 독립지사들은 상하이로 모여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일찌기 노령정부와 한성정부가 대표단을 파견해 단일정부 협상에 적극성을 보여준데서도 잘 드러난다. 주ㆍ객체적 상황 모든면에서 상하이는 임시정부를 유지하기에 유리했다.

이같은 견해에 대해 중국 학계에서도 비슷한 입장이다. 상하이 푸단(復旦)대 쑨커즈(孫科志)교수는“청 말기 상하이는 중국혁명의 중심지이자 한국인 혁명가가 많아 임시정부 수립에 좋은 사회적 기초를 구축했다”며“조계지는 일본인이 들어가지 못해 안전이 보장됐고, 국제여론을 접하기도 쉬웠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경술국치로부터 8년. 민족의 역사를 다시 이어갈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상하이에 이렇게 만들어졌다. 그로부터 90년이 흐른 지금, 붉은 자본주의의를 대변하는 상하이의 화려한 네온사인 아래 우리의 독립운동을 얘기하는 것은 이방인의 덧없는 추억일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 애국지사들은 무려 27년이란 조국해방의 투쟁을 이렇게 시작했고 또 살아 남아 승리했다. /상하이=맹창호기자 m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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