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비디 바비디부’ 해석하면 ‘생각대로 하면 되고...’라는 뜻이란다. 오래전 안데르센 동화 신데렐라에서 처음으로 ‘수리수리 마수리’라는 주문이 나타났다. 이 주문은 오늘날까지 마법 주문으로 통용화된 보통명사가 됐다.
▲ 도완석 연극평론가, 성남고 교장 |
문제는 그런 무의식 속에 잠재해있던 가치관의 변형이 부모가 된 후 자녀들에게 간접적으로 전이시켜 자녀는 인성적인 가치관보다는 환타지적 상상력에 치우쳐지게 된다는 사실이다. 해리포터나 반지의 제왕, 황금의 나침판과 같은 소설이나 영화에 아이들이 열광하는 이유가 바로 그런 현상의 결과이다.
아마도 아이들에게 워낭소리와 같은 감동적인 영화를 권유한다면 그들이 객석에서 과연 몇 분을 버틸 수 있을까? 인성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이 환타지적 상상력에 밀려난다는 사실은 과학발전에는 어떤 좋은 결과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성이 요구되는 미래사회에서는 실로 심각한 사안이 아닐 수가 없다.
그런데 앞서 말한 바대로 요즘 아이들과 젊은이들이 또 다른 신조어의 주문에 열광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비비디 바비디부다. 문제는 대중문화 매체를 통해 계속 전파되고 있는 이 단어의 본뜻이 생각대로 하면 되고라는 데 있다는 점이다.
얼핏 듣기에는 독자적이고 창의력을 가지라는 뜻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좀 더 냉철한 판단으로 들여다본다면 이처럼 이기적이고 비이성적이고 사고력을 단순화시키는 말은 없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1960년대 후반에 ‘켄세라 세라(될 대로 대라)’라는 유행어가 전 미국과 유럽을 강타했고 이후 전 세계에 히피 열풍을 불러 인간의 가치관을 하락시켰다는 비문화혁명의 후폭풍을 일으켰던 것처럼 이 ‘생각대로 하면 되고’라는 언어에는 무수한 문제점이 있음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함께하는 공존의 사회가 요구되는 시점에서 이기적이고 반항적이고 남과는 무관한 비인격적인 삶을 부추긴다면 미래사회는 어떤 결과가 초래될 것인가?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남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생각대로만 행동하여 파문을 일으키는 비도덕적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전처의 어린 아이를 보기 싫다고 굶기고 찬 겨울에 옷을 벗겨 추위에 몸을 얼게 하고 때려 숨지게 한 계모가 있질 않나, 부모이혼으로 가출해 굶주린 어린 가장들과 생활능력 없는 노인들을 위해 정부에서 마련한 복지기금들을 수십억 원대 가로채는 공무원이 있질 않나.
우리는 날마다 생각조차 하기 싫은 비인간적인 뉴스를 접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지난 2주 전 어느 기사를 통해 알게 된 새로운 단어가 있다. 필리버스터(filibuster)라는 단어인데 ‘의사진행방해’라는 뜻이다.
문득 떠오르는 것은 이 시대 이사회에는 수많은 원칙과 정도(正道)가 역사라는 과정의 통로로서 유통돼 가고 있는 데 합당한 이유도 근거도 없이 필리버스터라는 목소리 큰사람들에 의해 의사진행 방해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도 알고 보면 비비디 바비디부를 파렴치하게 실천하는 소행이 아니겠는가? 지금 우리 사회 곳곳에는 이런 비비디 바비디부를 외치는 필리버스터(filibuster)들이 너무 만연돼 있다.
소속 단체에서 두 번씩이나 낙마를 하자 보복으로 소속단체 회원들을 간사하게 분리시켜 또 다른 단체를 만들고는 기존 명칭 사용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 예술인으로서의 소임보다는 생존에 필사적이어서 창작활동을 외면하고 행정기관이나 정당에 빌어 붙어 아부하며 살아가는 사람.
어디 그뿐인가? 자기 책무에 소홀해 문제가 야기되자 노조에 호소, 방패막이를 해달라고 구걸하는 사람, 우리 주변과 이 사회에는 너무나 다양한 필리버스터(filibuster)들이 비비디 바비디부를 외치며 기생하고 있다.
인간성의 회복이 요구되는 시대이다. 더 나아가 인간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하늘을 우러러 바라보는 몸짓이 필요한 시대이다. 작고하신 김수환 추기경님에 대한 추모의 열기가 더욱 확산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