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히어로 영화로는 처음으로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받은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슈퍼맨 배트맨 원더우먼 엑스맨…, 정의의 사도로 각인되고 익숙한 이들 슈퍼히어로들이 사실은 미국 정부의 지시를 받고 움직이는 에이전트라고 생각해보라. 그래서 정부의 지시로 J.F.케네디 대통령을 암살하고 월남전에 개입해 전쟁을 미국의 승리로 이끌었다면. 가정만으로도 우울하다. 믿음을 배신하는 ‘일그러진 영웅’들의 우울한 이야기를 청소년들에게 들려주긴 좀 그렇다.
‘진짜 현실 세계에 발 디딘 슈퍼히어로의 모습은 어떨까’ 고민했다는 원작자 앨런 무어의 붓놀림은 짓궂다.
배트맨을 빼닮은 나이트 아울은 성불구의 중년이고 원더우먼을 연상시키는 실크 스펙터는 과거의 무게에 짓눌려 산다. 슈퍼맨 닥터 맨해튼은 인간에 대한 연민을 던져버린 냉혈한이고 감정에 따라 마스크가 변하는 로어셰크는 폭력으로 정의를 실현하려는 폭력주의자다.
줄거리는 이렇다. 1985년 미국 뉴욕.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승리한 뒤 닉슨이 3선에 성공한 가상현실이 배경이다. 세계를 그렇게 만든 주체는 ‘크라임 버스터스’라는 슈퍼히어로 조직. 은퇴 멤버 코미디언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살인사건 이면에 감춰진 진실을 파헤치던 로어셰크는 히어로들을 제거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게 되고, 한때 동료였던 히어로들과 만나면서 히어로 모두의 과거와 얽혀있는, 인류를 파멸로 몰아갈 수 있는 거대한 음모와 맞닥뜨리게 된다. 히어로들은 활동을 재개한다.
앤디 워홀의 ‘먼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등을 패러디 하는 오프닝, 감정 상태대로 변하는 로어셰크의 마스크, 닥터 맨해튼의 부활 장면은 꽤 인상적이다.
타임지는 100대 소설에 선정한 이유를 “냉혹한 심리학적 사실주의, 중첩된 이야기 구조, 반복되는 모티브를 보여주는 매혹적인 그림을 포함한다…. 『왓치맨』은 젊은 매체의 진화에 분수령이 됐다”고 설명했다. 영화로 만들기엔 이야기 구조가 너무 복잡하다는 얘기다.
잭 스나이더 감독은 원작의 주요한 장면들을 거의 오려서 붙인 것처럼 그대로 화면에 옮겨 놓는 것으로 어려움을 피해간다. 과연 그것이 옳은 선택이었을까.
뼈와 살과 피가 부러지고 찢기고 튀기는 원작의 과격함은 스나이더 특유의 호들갑떠는 듯한 슬로모션 설계에 힘입어 생생하게 영상으로 살아난다. 하지만 너무 길다. 2시간 40분 동안 실타래처럼 얽힌 사건을 꿰맞춰가는 것은 지적게임이라기보다 지루하다.
원작을 아는 관객들은 ‘검은 화물선’ 에피소드가 빠진 것이, 또 거대 문어의 뉴욕 습격 장면이 사라진 것이 아쉬울 것이다.
미국의 현대 신화로서의 히어로 물을 완전히 짓밟고 해체하는 묵시록이자 비범한 오페라. 어제 개봉된 영화 ‘왓치맨’을 보고 나온 관객들의 반응은 첨예하게 엇갈렸다.
“화려하게 보이지만 원작 만화를 스크린에 그대로 옮긴 밋밋한 영상”이라는 혹평이 있는가 하면 “화려하고 혁신적인 영상미, 파워풀한 액션이 볼만했다”는 호평도 따랐다. /안순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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