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현지에서 취재 중인 맹창호 기자(오른쪽)과 금상진 기자. |
지난해 올림픽을 앞두고 외국기자에 취재분위기가 관대해졌다가 이후 오히려 강화됐다는 소문은 사실이었다. 1시간여 출입국관리소 직원들을 설득해서야 간신히 장비를 찾을 수 있었다. 그들을 설득한 것은 엉뚱하게 저우원라이(周恩來)였다. 절대 통과시킬 수없다는 그들과 대화 가운데 우연히 저우언라이가 항일전쟁에서 한국의 독립을 지지했다는 말에 그들은 상당한 호기심을 보였다.
마오저둥(毛澤東)이 중국인에게 아버지의 엄격함이라면, 저우언라이는 어머니의 푸근함이라고 한다. 어째든지 그들에게 중국의 긍정적인 면을 촬영한다는 약속을 조건으로 카메라를 돌려받았지만 취재기간 내내 촬영장비는 여러차례 중국관리와 군인들의 손에 넘어가야 했다. 공안이 나타나면 별수없이 카메라를 숨겨 자리를 이동하는 도둑촬영이 계속됐고 그때마다 영상기자와 현지통역은 비지땀을 흘려야 했다. 공개된 장소조차도 군부대와 관련이 있다는 이유로 카메라를 빼앗으려고 했다. 그들이 보는 앞에서 촬영내용까지 지웠지만 대듬 장비부터 압수하려 들었다.
1개월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취재진은 2009년 1월3일부터 24일까지, 2월 6일부터 15일까지 32일간 하루 평균 359㎞씩 1만1500km를 항일유적을 따라 이동하며 직접 보고 기록했다. 113개소의 항일유적을 직접 확인했다. 확보된 현지사진은 모두 1100장과 동영상 1000분 분량에 담았다.
특히 광복군 OSS대원들의 낙하산 훈련지가 취재진에게 처음으로 확인됐다. 이는 시리즈 10회 기사‘우리의 힘으로 광복을’편에서 공개할 예정이다. 정부가 조사한 일부 유적이 엉뚱한 곳임을 찾아내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돌보는이 조차 없어 폐허로 방치되고, 쓰레기장이 된 애국지사들의 묘역에서는 할말을 잃었고 가슴이 뻐개지는 듯한 아픔을 겪었다.
1차 취재는 항조우→지아싱(嘉興)→상하이→쩐강(鎭江)→난징(南慶)→린취안(臨泉)→푸양(阜陽)→우한(武漢)→창사(長沙)→광조우(廣州)→류조우(柳州)→꿰이린(桂林)→쿤밍(昆明)→청두(成都)→치장→총칭(重慶) 등 임시정부의 이동경로에 근접시켰다. 2차 취재는 텐진(天津)→타이항산(太行山)→뤄양(洛陽)→시안(西安)→옌안(延安)→텐진 등으로 광복군과 조선의용군의 활동지역에 촛점을 맞췄다. /항조우ㆍ총칭=맹창호기자 m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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