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적한 땅이었던 ‘한밭’은 1948년 정부가 수립되고 1949년 지방자치법이 발효되면서 대전부(府)에서 대전시(市)로 승격했다. 지난 1979년에는 충남도에서 분리돼 직할시로 격상돼 지금의 대전광역시를 이루는 첫발을 뗐다. 이같은 도시 발전에는 교통, 통신, 과학 등이 밑거름됐다.
과거 밭 갈구던 땅에는 도로가 개설되고 아파트가 들어서고 연구단지 등이 세워졌다. 도시의 외연 팽창 뿐 아니라 공간에 살고 있는 시민들의 삶의 질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지난 79년 광역시(당시는 직할시)로 승격된 후 대전시 예산 규모만 10배 늘어났다. 불과 20년 만의 일이다.
올해는 대전시가 지방자치법에 따라 일반시로 승격한 지 60주년, 광역시 승격 20주년되는 해다. 대전시민의 감회가 남다를 수 밖에 없다.
이에 본보는 이를 기념해 도시의 상징이고 대전발전의 근간이 됐던 현장을 찾아 과거와 현재, 미래를 조명해 보는 연중 기획물을 준비했다. <편집자 주>
▲ 1970년대 보문산에서 바라 본 대전시내 전경. |
대전 발전의 축은 대전천을 넘어 서쪽으로 진행됐다. 당시 마을 단위였던 ‘정’은 ‘동’으로 변경됐고 행정수장인 ‘부윤(府尹)’은 시장이 됐다.
1963년 당시 대전시는 유천면 전역과 회덕면의 대화·오정·가오리 등을 대전시로 편입해 시역을 확대했다. 1970년대 들어서도 도시와 공업화의 성장은 더욱 촉진돼 대전의 시역은 외곽으로 공간적 확대는 물론 내부지역에서 인구 밀집화로 인한 분동현상도 두드러졌다.
1970년 1월에는 삼성, 선화, 문창 등 대전의 중심지역에서 1·2동으로 한 개동을 나누는 절차를 통해 동의 수가 증가했다. 또 경부고속도로와 호남고속도로의 개통 등 외적 조건의 발달에 힘입어 1983년 대덕군 유성읍 전역과 회덕군 전역 그리고 관저·도안·가수원리 등을 편입해 대전시 지역을 크게 확장해 지금의 대전시 모습을 만들었다.
이후 대전시 시세 확장은 주로 유성과 대덕연구단지 쪽으로 진행된 게 특징이다. 1988년에는 중구 담당이던 복수, 도마, 괴정동을 분리해 서구청을 신설했다. 1989년에는 대덕군 전역을 편입하고 곧바로 직할시로 승격하게 된다. 1995년에는 직할시가 광역시로 개편됨에 따라 대전직할시도 광역시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또 1983년 대덕군 유성읍 및 회덕면 전역과 구즉면의 전민동, 신성동 등의 41개 동을 편입해 대전시는 95개 동으로 늘어났다. 면적도 539㎢로 확대됐다.
결국, 1949년 시 출범 당시보다 대전시 땅은 15배 더 넓어졌고 행정동의 숫자도 76개까지 늘어났다.
▲ 2005년 보문산에서 내려 본 대전시내 모습. |
광복 이후 대전의 인구증가 추이를 보면 1950년대는 재외동포와 북한 피난민 집단이 대거 대전으로 유입되면서 인구가 반짝 증가했다. 이 후 이들이 정착해 높은 출생률로 자연적 증가가 두드러졌다.
대전시 인구 증가는 높은 출산율 뿐만 아니라 대전 행정구역이 확대되면서 거주 인구가 늘어나는데 크게 기여했다. 1950년 12만 7000명을 기록했던 대전시 인구는 1960년과 1966년 사이에 7만 8000여 명이 늘었다. 1966년과 1970년 사이에는 10만 명이 증가했다. 1970년대에도 공업화 및 각종 산업과 문호시설 등의 대도시 재편으로 도시인구의 증가현상을 가져왔다.
그후에도 대전시 인구는 지속적으로 늘어 1989년 드디어 인구 100만 명 시대를 돌파했다. 이같은 인구 증가는 대전이 중부권 도시로 인구 흡입력이 커지고 정부종합청사와 연구기관 등의 대전 이전이 늘어나면서 인구유입현상도 심화딘 것으로 분석된다. 현대 대전시 인구는 140만 9000여 명이다.
▲ 1999년 둔산 신청사로 옮긴 직후 시청사 인근 전경. |
이 당시에도 대전시의 자체예산보다는 정부로부터 받는 지원예산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다. 전체예산의 36%가 보통교부금을 포함한 정부 지원수입이었다. /임병안 기자 victoryl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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