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선 빵을 나누자 한다. 임금과 복리후생비를 반납하여 반납할 임금도 받을 후생비도 없는 미취업자, 실직자를 돕겠다는 것이다. 봉급 삭감으로 일자리를 나누는 잡 셰어링, 근로시간 단축으로 일감을 나누는 워크 셰어링 개념이다. 대전시 공무원도 매달 얼마씩을 걷고 선진당은 세비 10%를 모아 일자리 창출에 지원하겠다고 나선다.
속으로 부글부글 끓는 공무원도 있으나 의심 없이 장한 일이다. 이러한 선행을 임금이나 깎을 뿐인 잡 스티킹으로 보거나 공익을 아주 사익적으로 만드는 말들은 허허롭다. 지하도에서 거지에게 행한 적선이 양심의 발로가 아니고 “(나만의) 행복, 자기안정”이라는 마크 트웨인의 어깃장처럼 뒤통수를 후려갈긴다.
문화와 교양으로 치장하고 만물의 영장으로 우쭐대지만 본질은 “재난을 분비하는” 하찮은 존재라는 에밀 시오랑의 독설이 있다. 인간에 대한 이보다 독한 모독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걸로 모자라 그는 인생을 “벌레들의 일”로 확인 사살까지 한다. 그런데 트웨인의 개미, 시오랑의 벌레, ‘워낭소리’의 소가 하나같이 인간을 정조준하고 있는 것 아닌가.
바로 이 말! 그 정직한 삶과 정직한 노동 앞에 겸허하게 옷매무새를 고쳐야 했던 메시지. 그것은, 고기소가 아닌 일소는 가축이 아닌 가족이다라는 인정 이상의 것이었다. 극장을 나서면서 폴 오스터의 ‘빵 굽는 타자기’가 또 생각났다. ‘핸드 투 마우스’(입에 풀칠하기)라는 원제도 놀랍지만 이걸 ‘빵 굽는 타자기’로 바꾼 번역 솜씨도 놀랍다.
타자기와 키보드와 함께 밥의 준엄함을 늘 일깨워주는 오브제가 개인적으로는 압력밥솥이다. 압력밥솥 꼭지가 비칠비칠 추는 춤이 좋아 20년 넘게 시커먼 구식 밥솥으로 밥을 짓는다. 푸슬푸슬 밥이 되어가는 과정과 비릿한 내음은 밥의 행복함과 밥의 준엄함을 동시동작으로 환기시킨다. 맹렬히 자판을 두드리는 기자에게나, 목탁을 치는 스님에게나, 교태를 파는 기생에게나, 죽도록 밭 가는 소에게나 밥의 의미는 다르지 않다.
밥이 이같이 준엄하더라도 밥상은 둥글어야 한다. 일자리 나누기는 나만 살자고 엎어버린 모난 밥상이 아니라 둥글디둥근 어머니의 두레밥상 같아야 할 것이다. 또한 일감 만들기는 천하 모든 것을 다 품고 있던 양반댁 여인들의 열두 폭 치마 같은 것이어야 한다. 밥은 달리 묘안이나 대책이 없다. /최충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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