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전 한남대 사회문화대학원장/대전연극협회장 |
그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의 언어는 격하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는 높지 않았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언어를 숨죽여 기다렸다. 그가 차지한 카톨릭 교계의 위치에서 가만히만 있어도 충분히 존경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차지한 위치로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다. 그는 두려움으로 아무도 말하지 않을 때 꼭 말해야 할 것을 분명히 말했다. 그 언어가 오늘날 이 정도의 민주주의를 구가하는 우리 현대사의 징검다리였다. 그가 우리 곁을 떠났다.
그러나 사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카톨릭이 지배하던 중세 천년은 특이한 역사시대였다. 신앙의 이름으로 무자비한 폭력이 자행되기도 했다. 우상과 미신이 횡행했고 신의 이름을 빌어 종교재판을 벌이고, 마녀사냥을 일으켰다. 11세기에서 13세가까지의 200년에 거친 아랍세계에 대한 유럽인들의 십자군 원정은 교황들의 정치적 욕망과 어우러져 진행되었고, 그 과정에 당시 200만명의 인명 손실을 가져왔다.
당시를 배경으로 한 세계 명작 <현인 나탄>(레싱)에서 예루살렘 총대주교는, 기독교도 부모의 보호를 받지 못한 갓 난 여아가 한 어진 유대인에 의해 받아들여져 훌륭히 양육 성장된 것을 알고, 이 유대인이 배교를 유도했기에 화형을 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 아이에 대해서는 그렇게 영원히 타락되느니 차라리 죽었어야 한다는 모진 말을 내뱉는다. 전 교황 바오로 2세는 그때의 오류를 공식 사과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의 기독교 역사는 또 달리 특이하다. 중국을 통한 카톨릭 포교는 우리 역사에서 근대의 시작(실학)이었고 조선말 일제 초기의 프로테스탄트의 포교는 신교육의 시작이었다. 세계 유래 없는 초고속 산업화와 현대화 그리고 민주화 성공의 상당 몫은 한국 기독교에 둘 수 있을 듯하다. 강남의 유자가 강북에 가면 탱자가 된다는 말이 있다. 기독교가 우리 역사 흐름의 와중에 중인 이하의 계층과 만난 것이 그 이유였을까?
종교적 종파를 넘어 존경을 받던 추기경의 서거는 어쩌면 한 시대의 마무리일지 모른다. 요즘 뉴 라이트니 뭐니 하며 정당과 구분이 안 되는 집단 안에 있는 자칭 신앙인들의 외침은 그의 목소리에 비할 때 많이 거슬린다. 신앙인의 목소리는 역시 눌린 자들을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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