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인 1999년 9월 1일자 중도일보 5면(지령 제10441호). 언론에 비치는 것을 좀처럼 허락하지 않았던 김수환 추기경은 그날 대담에서 새로운 천년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향을 제시한다 . 그 중심엔 자기반성, 약자에 대한 배려, 북한동포 돕기 등 평생 화두로 삼았던 인간 존중 정신이 오롯이 담겨있다. 고 김수환 추기경이 변평섭 당시 중도일보 주필(현 충남역사문화연구원장)과 나누었던 대화를 전면에 담는다. <편집자주>
새천년은 우선 소중한 마음으로 맞이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루하루 한해 한해를 맞이하는 데도 그것이 나에게 새로운 참된 출발을 하게 하는 새날 새해라 인식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맞는다면 그날의 의미를 깊이 새길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그러면 하루, 새날을 값지게 살아야한다는 다짐을 더 깊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앞에 있는 새천년은 그런 의미에서 더 엄숙함과 의미를 새기면서 장엄하고 감사하는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면서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지난 세월에 대한 깊은 반성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외침 아래 나라의 자립도 빼앗기고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하는 억압된 식민통치 아래 살다가 해방됐습니다.그러나 해방의 의미도 잠시이고 분단된 조국의 슬픔을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6.25 동란으로 진화의 어려움은 컸습니다. 땅은 좁고 사람은 많고 부존자원은 없고....우리에게 가진 것이라고는 우리 자신밖에 없습니다. 이같은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러가지 시련을 겪으면서 이만큼 발전을 이룩했고 정말 놀라운 일이라 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발전속에서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고 큰 손실도 입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인간존중’보다 ‘물질 위주’의 가치관으로 변질됐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서 열심히 일한 것은 좋은데 황금만능주의가 퍼져 정직과 성실을 잃었습니다. 그 부작용으로 빈부의 격차가 벌어지고 인권유린사태도 발생했습니다. 부정과 부패가 만연하고 그에 따라 부끄러운 사고도 많이 발생했지요. 이런 상태로 새로운 천년을 맞이할 수 있겠는가 하는 자기반성이 있어야 합니다.
어느 부잣집이 갖출 것을 다 갖추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족간에 서로가 서로를 존중할 줄 모르고 서로 무시할 경우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반대로 그보다 (경제적으로) 훨씬 못한 평범한 가정이라 하더라도 가족간에 서로 소중히 여기고 서로가 서로를 위할줄 알고 고통을 나눌줄 알때 그 집에는 분명히 행복이 있고 평화가 있을 것입니다.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제 발전과 과학발전을 통해 국민소득이 1만달러를 넘어 2만달러가 됐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만일 인간이 빠지면, 인간을 소홀히 대접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경제발전이나 과학발전속에 인간이 빠지면 그것은 사상누각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을 희생시켜 가면서 과학(복제인간)이 발전할 경우 얼마나 불행을 가져올 것인가는 뻔히 내다보입니다. 이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고 인간에게 공포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장애인으로 향한 애정>
가톨릭교회에서 국내 입양을 위한 집을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이 집에는 팔 다리가 없는 ‘구원’이란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장애아였습니다. 누가 입양해 갈 것인가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청주에 있는 신자중 한 사람이 입양해 갔습니다. 몇년이 지난뒤 아이를 데리고 찾아왔는데 그 사람들이 아주 감명 깊은 말을 전해주었습니다. “우리가 구원이를 통해 정말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입는 것 같습니다”고 말하더군요. 우리 사회가 장애인들을 배척해서는 절대로 우리가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그들이 대접받을때 우리는 그들을 통해서 행복을 누릴 수 있거든요.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인간을 소중히 하고 인간을 위하고 사랑할줄 알야야 합니다.
<북한동포는 같은 핏줄>
북한동포도 우리의 동포입니다. 지금 그들은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같은 핏줄이기에, 동포이기에 도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이유가 붙을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북한이 우리가 도움의 노력을 하는데도 여전히 도전적이고 (우리를)적대시하고 잠수함도 내려보내고 금강산 여행객도 잡아놓는 등으로 여론이 나빠져 ‘왜 그들을 돕는가’하는 지적도 심정적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한다해서 도움의 손을 끊는다는 것은 그들을 영원히 우리의 적으로 만든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냉정히 생각해야 합니다. 똑같이 미워하고 배척하면 우리와 그들과의 관계는 단절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태도를 취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어려움을 도우려고 할때 진심은 전달될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최근 세비야에서 열린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 북한의 한 처녀가 마라톤에서 1위를 할때 우리 국민들은 모두 즐거워했습니다. 같은 동족이라는 의식때문이지요. 굶는 사람들에게도 같은 정으로 도와야 합니다.
최근 개혁때문에 정부도 진통을 겪고 있는데 하여튼 진통을 겪더라도 개혁은 진행돼야 합니다. 지금까지 (재벌)기업들이 국가 발전을 위해 노력을 해왔고 또 고맙지만 (이들이) 국민의 기업이란 인식이 돼 있지 않은게 문제입니다.
국민 모두가 참여하고 인정하고 열린기업으로 개혁돼야 합니다. 그러나 기업을 위해 노력해 온 사람들을 너무 코너로 모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들 스스로가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나라를 위해 대국적으로 개혁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기업이 모든 국민의 사랑을 받고 또 국민을 위하는 열린 기업으로 개혁될때 그 기업은 21세기 세계적인 기업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정치분야가 개혁돼야 합니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국민을 위한 정당이 돼야 합니다. 자신들을 위한 정당이 돼서는 안됩니다. 현재로서는 뭘하는지. 개혁을 하는지, 누구를 위한 정당인지 알 수가 없는. 끼리끼리 몫을 나눠먹는 형상이라 안타깝습니다.
<장면박사와 그리고 제2공화국>
신부가 되기 직전인 가톨릭대학 학생때 장면 박사 그분을 처음 만났습니다.
그 분은 한마디로 인품이 훌륭한 인물이었습니다. 장면 박사는 또 국가를 위해 헌신한 인물이었습니다. 비근한 예로 1948년 12월에 유엔합법정부 승인을 받을때 백방으로 뛰어 한국의 유엔 가입을 이끌어냈지요. 6.25 사변이 발생했을때도 장면 박사의 역할은 대단했습니다. 세계 16개국이 유엔군이란 이름으로 우리나라를 도우러 오도록 외교력을 동원한 거도 장 박사의 고군분투로 이뤄졌지요. 그때 유엔군이 오지 않았다면 오늘이 없지요. 모두 공산화됐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현재 중도일보도 없고 나도 없습니다. 그는 우리 조국을 위해 고군분투했다고 생각합니다.
<종교, 종교인의 길>
종교인으로서 특정종교를 거명할 필요는 없지만 종교가 제구실을 하고 있느냐 할때 실제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기반성이 있어야 하고 또 각 종교가 나름대로 반성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종교를 위한 종교냐 아니면 사회를 위해 빛이 되고 소금이 되고 사랑의 삶을 살고 있는 종교냐를 깊이 반성해야 합니다. 이웃을 위하고 사회를 위하고 나라를 위하고 인류를 위하고 온세계를 위한 종교로 변모돼야 합니다. 거기에는 자성이 있고 자기 혁신이 뒤따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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