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팔현 충청역사문화연구소장은 “설화를 설화 자체로 받아들이는 것이 현명할 것”이라고 전제하며 “서동요는 가능성이 희박했던 꿈을 이룬 무왕과 관련한 전설로 백제 8대 성씨로 큰 권력을 행사하던 좌평 사탁적덕이 서동을 백제왕으로 뒤에서 물심양면 도와줘 등극시킨 일이 시간이 지나면서 사탁적덕의 딸이 신라 선화공주로 왜곡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 장팔현 소장 |
‘무령왕 창건설’을 주장한 사 교수는 사리봉안기에 나오는 기해년은 무왕 40년 639년이 아닌 무령왕 18년인 519년으로 삼국유사 ‘무왕조’에 무왕도 고본에는 ‘’무강왕(武康王)‘으로 기록되어 있어 곧 무령왕이라는 것이다.
또 신라와의 싸움과 방탕한 생활을 즐겼던 무왕 대에는 국력과 재정을 탕진해 백제가람사에 전무후무한 대규모 국찰(國刹)을 지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이에 대해 장 소장은 “언어학적 접근으로 편안할강(康)자가 편안할 녕(寧)자와 통하는 글자임에는 동의하지만 무령왕을 사마왕(斯麻王 또는 斯摩王), 호령왕(虎寧王)이라고는 했어도 삼국유사 고본 외 어디에도 무강왕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없어 보다 철저한 고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음주가무를 즐기던 무왕 대에 미륵사 같은 큰 사찰 건립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사 교수의 주장에 대해서도 장 소장은 “무령왕 대에 국력이 일취월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무령왕 대에 대규모 사찰을 지었다는 기록은 없다”며 “만일 무령왕이 미륵사 같은 대규모 사찰을 지었다면 분명 삼국사기나 적어도 일본과 우호적이었던 인물이기에 ‘일본서기’에 기록되었을 텐데 어디에도 신라의 선화공주와 무령왕이 결혼했다는 기록은 없다”고 덧붙였다.
또 무령왕 대에 불교가 융성했다는 이야기에 대해서도 장 소장은 “무령왕 대는 불교보다는 도교가 유행했다”고 주장하며 “이의 근거로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은제탁잔에 그려진 새와 동물, 용 등의 문양이 도교가 추구하는 이상세계를 보여 준다“고 설명했다.
충남 연기군 출신으로 지난 2007년 ‘무령왕’이라는 소설을 출간한바 있는 장 소장은 일본에서 한일고대사를 공부하고 ‘양복 입은 사무라이 국가 일본’, ‘일본역사와 외교’ 등의 저서가 있다.
한편 사 교수는 21일 오후 2시 30분 충남대에서 열리는 어문연구학회 주최 학술발표회에서 ‘미륵사지석탑 출토문물의 예술사적 고찰’이란 발표를 통해 미륵사지 창건주와 서동설화의 주인공이 무령왕이라고 밝힐 예정이다./임연희 기자 lyh3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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