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순달 대덕대학장·한국과학기술대학 초대학장 |
대학설립을 제안하기 위한 이사회를 구성하고 그 이사회에서 발의한 정관을 과학기술처의 재가를 받아 국회 승인을 요청하는 한편 대전광역시 유성구 구성동 400번지 일원 10만 평에 한국과학기술대학 캠퍼스를 건설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대한민국에서 과학기술 영재교육에 관한 법적 근거로 설립된 최초이고 유일한 영재교육대학으로 한국과학기술대학이 1985년 6월에 창립되었다.
영재교육기관으로 지정되고 나니 일반대학에서는 상상도 못하는 여러 가지 혜택이 있었다. 학생 전원이 기숙사 생활을 하고 수업료와 기숙사비 모두 국비로 지원하여 학생들은 약간의 기성회비만 부담했다. 전국 학력고사 이전에 대학이 특차전형으로 학생을 선발했다. 무학년 무학과제로 학생을 선발하고 1년간 대학생활을 익힌 후에 개인의 적성과 능력에 따라 전공분야를 선택하도록 했다.
학력인정시험제도를 두어 교과목을 택하지 않고도 그 과목을 이수한 정도의 능력이 있다고 인정되면 학점을 인정, 부여함으로써 조기졸업이 가능해졌다. 20대 나이에도 박사가 배출되도록 목표를 세웠다. 과학기술자에게는 물리학은 눈이고 수학은 입과 같아 특히 중요한 점을 고려하여 수학과 물리는 150점 만점으로 하고, 다른 과목은 100점 만점으로 가중치를 다르게 하였다.
그러나 영재교육이란 생소한 교육을 교육비 전액 국가부담으로 최상급의 교육시설을 갖춘다고 언론 매체를 통해 광고해도 인지도 영(0)에서 신입생 모집은 전혀 쉽지 않았다. 전교직원이 전력을 다해 최상급 신입생 유치에 몰두하기로 결의했고, 교수들을 모교와 연고지로 보내 학생 유치활동을 하게 했다.
그날은 이슬비가 내리는 초봄 아침이었는데, 건물 2층의 학장실 창문의 커튼 사이로 교수들이 학생유치를 위해 승용차에 올라타는 모습을 보았다. 교수마다 대학소개 책자를 한 아름씩 안고 두 사람씩 조를 이루어 비록 1980년대 초반의 중고차였지만 희망을 품고 즐거운 모습으로 학교를 떠나는 광경이었다. 학교사정으로 충분한 출장비를 주지도 못하는데 희망을 품고 떠나는 그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감격의 눈물이 쏟아졌다.
그 후 많은 학부모 특이 젊은 어머니들이 대거 학교를 찾아와 자기네 자녀를 보낼 만한 대학인지 확인했다. 전통도 없고 선배도 없는 학교에 보내면 졸업 후 사회생활 하는데 상대적으로 불리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이 대부분이었다. 그 질문에 대해서 단호히 대답했다. 이 학생들이 사회에 진출할 때에는 선배와 전통을 찾기보다는 실력으로 평가되는 사회가 될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걱정은 안 해도 된다고. 첫해의 신입생 지원율은 540명 모집에 2.4대1 정도 되었다. 입학시험 문제는 누구나 풀 수 있는 쉬운 문제에서 아무도 풀 수 없는 어려운 문제까지 내게 했다.
수학문제를 낸 한 교수는 채점 후 흥분해서 학장실로 찾아와 보고했다. 자기가 서울대학교 수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의 한 대학에서 박사학위 공부를 하기 위해 지도교수가 되어 주십사 하고 찾아간 그 대학교수가 풀어오라면서 준 수학문제와 비슷한 문제를 입학시험에 출제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는 그 문제를 푸느라 꼬박 3일을 소비했기에 아무도 못 푸는 어려운 문제로 출제했는데, 그 어려운 문제를 완벽하게 푼 학생이 둘이나 있었다는 것이었다. 제1회 신입생에는 전국의 과학고등학교 2학년 수료자가 100여 명 있었고 고1 출신도 한 명 있었다.
이렇게 출범한 한국과학기술대학(현 한국과학기술원)이 영재학교로서의 역할뿐 아니라 대전이 과학기술도시로 발전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된 것이다. 영재교육의 산실(産室)이 된 대전이 앞으로도 우수한 과학영재를 세계적 인물로 길러내는 명문도시로 더욱 성장하고, 이로써 대한민국의 이름을 빛내는 데 큰 몫을 해주리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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