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기훈 부여군청소년 수련원장 |
용산 철거민 사태를 되짚어 보면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시위대와 많은 대화와 설득이 있었거나 진압시기와 방법에 좀더 신중을 기하고 시위 또한 너무 극닥적이고 조직적이지 않았더라면 하는 등등의 아쉬움을 남게한다
돌을 던지고 화염병을 투척하는 불법, 탈법의 폭력적인 시위와 저항은 아무리 생존형 시위라 하더라도 절대 정당화 될 수 없다. 정치권에서는 용산 철거민 사태를 당리당략에 리·불리(利·不)로 접근해서도 안될 뿐 아니라 특히 희생자들의 정치적으로 이용해서는 더욱 더 국민으로부터 지탄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앞으로 계속 이어질 재개발에 따른 강제 철거시 발생할 수 있는 갈등을 사전 예방할 수 있는 특단의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요즘 흔한 말로 경찰서는 몰라도 파출소는 동네북이 된지 오래인 것 같다.
술취한 취객이 파출소에 난입하여 경찰관을 구타하고 전투경찰이 시위대에 붙잡혀 집단 폭행당하는 공권력 부재의 모습은 세계 선진국 어느 나라에서도 상상조차 하기 힘든 장면이다.
시위현장에서 전투경찰과 대학생으로 조우하는 형과 동생, 또는 친구사이로서 서로 한발씩 양보하고 싶어도, 아무리 양심과 정의로 행동하고 싶어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전국 철거민 연합이 시키는 대로 따라야 하는 철거민과 상명하복해야 하는 경찰관이 겪어야 하는 동병상련의 처지일 것이다. 5명의 철거민과 1명의 경찰관이 귀한 생명을 잃었다.
사랑하는 아내와 부모 그리고 자식들과 헤어져 결국 혼자가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상부의 명령을 따랐을뿐 순직 경찰관의 유족들은 철거민 유족들의 눈에 띌까봐 숨죽여 울고 있었다.
죄없이 살처분되는 닭의 눈빛을 보았는가? 사망한 5명의 철거민처럼 1명의 순직 경찰관도 똑같은 피해자이다. 저승에 가서도 철거민 사망자들에게 쫓기지 않을까 걱정이다. 어쩌면 6명의 희생자들을 위한 천도제라도 지내야만 하지 않겠는가?
비겁자를 징벌하기 위한 복면시위 금지법, 근거없는 악성루머를 퍼트리는 자를 무고죄로 처벌하기 위한 인터넷 실명제. 다수결의 원칙과 타협, 신 자유주의와 배고픈 사회주의, 따뜻한 가슴과 냉철한 머리 등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서는 아니 될 것이다. 과잉진압과 직무유기, 단체 행동권과 폭력시위처럼 양극단을 버리고 상생의 중도(中道)를 택해야 할 것이다.
물론 생명체는 소통과 교감을 통하여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니 나와 남이 둘이 아니다. 눈으로 본 것만 옳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참회를 해아한다. 이 세상의 옳고 그름은 인간들이 지어낸 것일 뿐이다.
귀한 자와 천한 자,가진 자와 못가진 자, 잘 생긴 자와 못생긴 자,알고 보면 모두 한 망태기속에 들어있는 공동 운명체의 도토리들이나 똑 같은 것이니 도토리 키재볼 것도 없다.히틀러 암살미수사건을 다룬 ‘발키리’란 영화를 보면 정치에 침을 뱉으면서도 권력에 줄을 대고 싶어하는것이 인간을 포함한 영장류의 속성인가보다. 물론 정치인이라고 하여 모두 나쁜것도 아니고 채식주의라고 모두 선한것도 아니다. 본능과 이성, 모두가 필요한것이기 때문이다.
한쪽에 치우치지말고 항상 전후좌우 상하에서 깊이 관찰하고 또 뒤집어 보면서 배타적인 마음을 버리고 얼마나 더 욕심을 내야 다른 사람의 배고픔을 알겠는가? 조금씩 양보하고 역지사지(易地思之)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서로 대립할 이유가 없다.
어려울때 일수록 국가는 국민의 의미를 국민은 국가의 의미를 마음속에 되새겨 봐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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