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미덕이라 여기는 것은 우연이나 우리의 간계에서 비롯되는 온갖 행동과 이해관계의 집합체에 불과하다”
▲ 김운하 소설가 |
자존심은 세상에서 제일가는 모사꾼이자 아첨꾼이며, 철학자들의 삶에 대한 태도나 비평도 실은 자존심에 대한 그들의 해석일 뿐이다.
극단화시키면, 인간은 그저 추한 이기적 위선과 악덕들로 가득찬 야수일 뿐, 거기서 아무런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을 발견할 수 없을 것 같다.
그가 인간혐오에 빠져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많은 결점들과 모순, 허약함과 위선으로 복잡하게 얽힌 동물이긴 하지만, 역설적으로 지혜와 강한 정신력으로 고귀하게 될 수도 있는 동물임을 말한다.
그는 다만 세상이 강조하는 것 이상으로 인간이 더 겸허해질 필요가 있음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악덕을 교묘하게 감추고 그것을 미덕으로 위장할 수 있을 정도로 오만하고 위험한 동물이기에, 그것을 드러냄으로써 부끄러움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몽테뉴는 마흔 살 무렵에 공직에서 은퇴한 후 한적한 시골집 서재에 틀어박혀 죽는 순간까지 “나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마치 해부학자처럼 자신을 대상으로 하여 인간에 대해 분석하고 성찰하여 그것을 글로 남겼다.
라로슈푸코처럼 신랄하거나 염세적이지는 않지만, 그토록 솔직하고 겸손한 미덕을 발휘한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끝없는 자기연민, 자기 비하는 상처 받은 나약한 자존심을 거짓되게라도 위로받으려는 헛된 위장에 불과하다.
거기에 콤플렉스까지 더해지면 최악이 된다.
그것은 증오와 질투, 시기심으로 바뀌고 그것이 극단화 될 경우, 살인과 같은 범죄를 일으키게 되기도 한다.
반면, 건강한 자존심도 있다.
긍정적인 의미에서 자신을 존중하는 능력.
자신의 결점과 한계, 단점뿐 아니라 장점과 능력을 동시에 보고, 자존심을 긍정적인 방식으로 세계에 표현하는 것이다.
나는 고귀한 정신이라 불리는 인물들은 바로 그런 자존심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상처 받은 자존심, 세상과 타인들과의 불화를 복수와 증오, 시기심이라는 부정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긍적적으로, 즉 윤리적이고 미학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
플라톤, 단테, 굴원, 도연명, 김시습도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타고난 내면과 정신이 위대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지 않기 때문에 고귀하고 위대해지려 무서운 집념을 발휘했던 사람들.
결국은 “정신력과 목표의 강도” 차이인 것이다.
고귀한 목표와 굳센 정신력을 발휘하는가, 아니면 아무런 목표나 정신력이 없는 탓에 고작 자신을 위로하며 자기 연민에나 빠지고 말 것인가. 나는 아직도 전자에 희망을 걸고 있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