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케라는 독일 시인이 사랑은 농사짓기이며 토목공사와 같은 노동이라 했다. 젊어서 콧방귀를 뀌고 말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이 말이 맞다. 선화는 밖을 얼른거리며 숨어 남 몰래 오지/ 서방 맞아들여놓고 서동의 살집(皮肉)을/ 가쁜 숨 몰아쉬어 누워 뒹굴어 안아 풀 것이여. <서동요>를 새로 해석해봐도 그렇고.
서동요의 진실 공방이 뜨겁다. 신라 진평왕의 딸이자 백제 무왕비인 선화공주가 무왕에게 절을 간청하여 미륵사를 지었다는 내용과 상이한 기록 때문이다. 삼국유사 무왕 조(條)의 신빙성에 대한 의문은 처음이 아니나, ‘선화공주 로맨스는 없었다’가 ‘선화공주는 없었다’로 비약, 강렬한 시적 메시지와 유산까지 부정하려 든다.
설화란 역사적 진실이기 전에 이야기다. 아무 이야기나 설화가 아니다. 온달과 평강공주의 설화는 단양에서 온달 산성이 발견되어 역사로 인정받지만 설화적 요소를 배제할 수 없다. 춘향전과 관련해서는 실존인물인 남원부사 성이성(成以性)의 아들과 기생의 못 이룬 사랑을 문학작품으로 풀어줬다는 논문도 나왔다.
이야기의 세계에서는 내부적 필요성에 의해 줄거리를 규정한다. 같은 문맥에서 미스 서라벌 선화공주의 비련을 슬퍼한 일연이 그녀를 백제의 왕비로 부활시켰을 수도 있다. 미륵사가 무령왕 대에 세워졌다는 주장, 서동의 실체가 동성왕이거나 원효라는 주장은 따로 밝혀낼 일이다.
비범한 방식으로 나서 살아가는 구조는 설화의 기본 문법이다. 서동이 용의 아들이라는 것도 문학적 복선이다. 왕이 용이고 용자는 왕자인 것은 왕이 의자가 용상, 왕의 얼굴이 용안인 것과 같다. 역사로든 설화로든 서동요는 우리 간접체험이며 미학적 자극이다. 서동이 애정 행각을 벌인 무대는 역사이거나 최소한 예술세계다.
선화공주가 설화의 주인공이라도 아름다운 사랑이 훼절되면 안 된다. 원술랑이 말을 타고 찾던 기생집, 역신 처용이 밤늦게 놀던 신라의 밤거리까지 역사 공간화하려는 걸 보라. ‘백제 왕후가 좌평 사택적덕의 따님으로’라는 구절을 ‘백제 왕후와 사택적덕의 따님’으로 해석할 여지도 남겨뒀다. 선화공주는 또다른 역사이다.
사리봉안기를 근거로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지금에도 잃은 것은 없다. 부여사람들이 마래방죽이라 부르는 가장 오래된 연못에서 그들의 결혼을 기리는 데 전혀 지장이 없는 것이다. 서동설화는 문화적 동기와 문화감동성의 매개물로 남아야 하고 부여 서동·연꽃축제, 익산 서동축제는 계속돼야 한다. 서동요는 한 시대에만 묶어둘 노래가 아니며 선화는 우리에게 연분홍 꽃색시로 영원히 담겨진 ‘서 있는 여자’일지 모르니까. /최충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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