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0여 년 전 향가 ‘서동요(薯童謠)’는 짧은 노래 속에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기 위한 맛둥(서동)의 사랑과 야망, 풋풋한 아름다움까지 녹아들어 있다.
익산 미륵사지 서쪽 석탑에서 미륵사 창건 당시를 담은 사리봉안기가 출토됨으로써 그동안 창건주체로 알려졌던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와의 로맨스가 흔들리고 있다.
그렇다면 서동요의 주인공 서동은 과연 누구이며 선화공주는 누구에게 시집을 갔는지 등 서동설화에 대한 의문을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재구성했다.
▲ 이도학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 |
재위기간이 600년에서 641년까지 매우 길었던 무왕시대에는 봉안기에 기록된 백제왕후 말고도 다른 왕비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왕실사찰에서 발견된 발원문에는 나라의 평안은 물론 왕과 태자의 안녕을 비는 내용이 들어가는데 미륵사 석탑 봉안기에는 태자에 대한 언급이 없어 선화공주가 세상을 떠난 뒤 무왕이 새로 맞이한 백제왕후가 아직 아들을 낳지 못한 게 아닌 가 추정된다.
아울러 미륵사는 한 왕비 집안의 재력만 가지고 지을 수 있는 사찰이 아니라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해 조성한 국찰(國刹)로 석탑 한군데서 나온 봉안기가 미륵사 창건의 전모를 보여주기는 부족하며 무왕의 젊은 왕비가 전 부인인 선화공주의 흔적을 지워버린 흔적을 엿볼 수 있다.
▲ 김봉건 국립문화재연구소장 |
또 이번 유물이 발굴된 곳은 서탑으로 서쪽 가람은 백제 귀족의 딸인 왕후가 짓고 중원은 선화공주가 세웠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며 실제로 가운데 목탑과 동·서탑은 양식뿐 아니라 시대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미륵삼존과 연못의 존재가 확인됐으며 연못을 메워 절을 건립하고 사자사(사자암) 가는 길 용화산 아래에 있다는 기록과도 일치하기 때문에 봉안기 하나만으로 서동설화를 부정하는 것은 과도한 해석이다.
▲ 사재동 충남대 명예교수 |
삼국유사 무왕조(武王條)에 나오는 무왕은 고본에는 무강왕(武康王)이라고 되어있는 것을 일부 학자들이 백제에는 그런 왕이 없다고 해 강(康)자를 생략해 무왕이라고 했는데 강은 ‘편안할 강’으로 무령왕(武寧王)의 가운데 자인 ‘편안할 녕(寧)’과 뜻이 통하기 때문에 무령왕을 의미한다.
또 동성왕 15년에 백제와 신라가 국혼한 사실이 있는데 당시 무령왕은 30세를 갓 넘긴 왕자였으니 국혼 사실이 서동왕자와 선화공주의 결연담으로 이어지고 이는 곧 서동요와 결부될 수 있다. /임연희 기자 lyh3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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