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소장은 29일 “삼국유사가 야사(野史)이고 삼국이 통일된 지 수백 년 후에 쓰여 졌기 때문에 100% 정확하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겠느냐”며 “이번 발표는 미륵사지 서쪽 석탑에서 나온 유물들을 공개하면서 사리함과 함께 봉안한 사리봉안기 원문만 공개한 것으로 심포지엄 등 본격적인 학술 연구는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밝혔다.
미륵사 창건주에 대해서도 김 소장은 “무왕창건설과 동성왕창건설, 무령왕창건설 등이 있는 만큼 기해년(己亥年)을 무왕 40년인 639년으로 단정하기는 이르기 때문에 관련 사료들을 가지고 학자들 간 충분한 논의과정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그는 “다만 삼국유사 기록에 백제 무왕 때 지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연못의 존재도 확인됐으며 발굴된 기와 편년으로 보아 무왕 대인 7세기 초로 보는데 무리가 없을 것”이라며 “경주 황룡사지보다 넓은 절을 짓는 데는 적어도 20~30년은 걸렸을 것인데 무왕의 재위기간(600~641)이 41년으로 무왕 초기에 건립을 시작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 김봉건 문화재연구소장 |
한편 한국전통문화학교 이도학 교수도 “사리봉안기만으로 서동설화를 부정해서는 안된다”며 “미륵사는 한 왕비 집안의 불사로 지은 사찰이라기보다 백제의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해 지은 국찰(國刹)로 봉안기의 백제왕후는 무왕이 선화공주가 세상을 떠난 뒤 새로 맞이한 왕비일 것”이라고 해석했다. /임연희 기자 lyh3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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