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 어느 날이 새로운 날이 아닌 것이 없건만, 유난히 새해 아침이면 모종의 특별한 결심을 세우곤 한다.
아마도 그것은 인간이란 시간을 區劃하고 스스로를 企劃하려는 본능을 갖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올해는 여느 해보다 생각이 많아진다.
▲ 강일구 호서대 총장 |
예측하는 기관마다 근래의 경제위기는 십여년 전의 구제금융시절보다 더 심각하다고 하고, 더 장기화될 것이며, 전 세계적 현상이어서 파장이 깊을 것이라고 한다. 이런 우울한 소식으로 새해를 맞으니 마음이 錯雜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에게 닥친 이런 고통의 잔을 물릴 수만 있다면, 물리려 하는 것은 인지상정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고통이라고 한다면 직시하고 분석해 희구하는 바로 나아갈 방도를 구안하는 자료로 삼아야 한다.
고난이 없는 세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성취에 따른 고통이 없다면 그것은 성취가 아니라 그냥 그대로 있던 것에 불과하다.
예컨대 그것은 마치 하늘을 나는 비둘기의 고민과 같다.
비둘기는 더 빨리 날고자 할수록 거센 공기의 저항에 직면한다.
빨리 날고자 마음먹을수록 악착같이 막아서는 공기의 저항 앞에서 비둘기는 생각한다.
이 공기가 없으면 더 빨리 날 수 있을 터인데 하고.
그러나 비둘기의 날개를 막아서는 바로 그 공기가 비둘기의 날개를 떠받치고 있는 양력의 근거임을 알지 못한 것이다.
인간의 삶이 바로 그렇다.
한걸음씩 理想을 향하여 나아가는 그 힘든 행보를 막아서는 시련과 고통이 사실은 그의 걸음을 가능하게 하는 떠받침의 근거라는 점을 잊는지도 모른다.
칸트의 비둘기는 공기의 저항을 한탄했지만, 우리는 우리에게 닥친 시련이 우리의 근거임을 알고 나아가야 한다.
큰 꿈과 고귀한 이상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정말 위대할 수 있다.
카뮈가 시지푸스의 신화를 통해서 알려주고자 했던 것은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그 부조리함에 맞서는 그 순간이 바로 人間 精神이 승리하는 순간이라는 것이었다.
우리의 미래와 이상은 너무도 분명하다.
그것은 존재의 터전인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따라 형성된 우리의 자의식을 실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주변의 조화와 함께 평화롭게 이루어지는 세계를 구현하는 일이다.
그곳을 향하여 가는 길이 시련과 고통으로 험하다 하여 포기할 수는 없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고귀한 이상은 인간적 한계에 의해서 빛나는 법이고, 인간적 한계를 극복하면서도 영원자를 향하여 나아가는 데에 인간정신의 위대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이 먼 별세계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디서부터 실현해야 할 것인가? 쉬운 일, 작은 일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바로 우리의 일상을 회복하는 일이다.
어떤 노인에게 不死藥이 있느냐고 물었다.
노인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백 일 동안 음식 대신 인삼, 복령, 구기자만 먹고 지냈지. 그런데 숨도 가쁘고 꼭 죽을 것만 같았지. 그러다가 쌀로 밥을 지어먹고는 죽기를 면했다우. 불사약치고 밥보다 나은 게 없는 셈이지. 그래서 나는 아침에 한 그릇, 저녁에 또 한 그릇 먹고, 이제 벌써 일흔이 넘었다우.”
높은 이상과 큰 꿈을 품되 그 시작은 작은 것부터, 우리 주변에서 할 수 있는 것부터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맡겨진 일종의 ‘위임’이라 할 수 있다. 이 위임은 보편적인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우리의 ‘위임질서’로 정립될 때 우리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
노인이 밥 대신 보약을 먹고도 죽을 뻔한 것이나 칸트의 비둘기가 어리석게도 공기가 없기를 바란 것은 그것이 우리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임을 잊었기 때문이다.
삶의 터전을 이루는 일상적인 하나님의 질서를 잊었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일상적이고 흔한 것과 하찮고 천한 것은 다른 것이다.
우리의 고전에서도 常이란 곧 떳떳함, 당당함이라고 하였다. 常의 회복은 인간으로서의 떳떳함을 회복하는 일이다.
우리가 그토록 많이 들어온 서로 사랑하라는 너무도 단순한 명령과 다른 별스러운 것이 아니다.
인간은 인간의 한계와 조건의 어려움을 딛고 건전한 상식과 누구나 받아들일 일상을 회복하는 길에 매진할 때에 인간다울 수가 있다.
그럴 때에, 더 깊고 더 크고 더 긴 고통이 닥쳐오더라도 우리는 이겨나갈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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