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민법상 동거의 의무(법 826조)를 성적인 의무방어전에 대한 규정이라 해석한다. 즉 칼과 칼집, 열쇠와 열쇠구멍 같은 관계를 규정한 것이다. 40대의 마르틴 루터는 1주 2회는 남편의 의무, 1년 104회를 어느 여자나 만족하는 수치로 제시했다. 법조문 어디에도 칼과 칼집의 적정 만남 횟수를 명문화한 규정은 당연히 없다.
그럼에도 칼이 있음에 칼집이 있다. 칼을 제대로 쓰자면 칼집이 있어야 한다. 성적 파트너인 부부에 성적 파트너십이 사라진다면 테이프를 원점으로 돌려봐야 할 중대 사안이다. 더 힘센, 칼자루를 쥔 수컷이 더 폭력적이다. 그러면서도 성을 매개로 하는 주도권 싸움에서 남자는 종종 불리하다. 그리스에서도 남자들이 ‘칼집’을 버려두고 전쟁만 일삼자 여자들이 섹스 스트라이크를 했을 때, 남자들은 항복했다.
강간을 물리법칙이라거나 양자역학적 우연이라고 우기는 것과 다름없는 노릇일 테니까. 이번 판결은 따라서 칼집에 대한 일종의 햇볕정책 성격이 짙다. 선진당 박선영 의원은 성적강요죄 신설을 담은 형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지만, 혼인신고서가 아내를 강간하는 자격증은 아닌 것이다. 단, 지나친 이데올로기적 접근이나 이혼과 재산 분할 등에 오·남용된다면 칼과 칼집에 불행이다.
단단한 칼이 칼집에 들어가면 이내 얌전해진다. 우리 몸에 내장된 치유 프로그램이 그렇다. 사랑(amor)은 발음해보면 배고파 젖을 빠는 입 모양에 가깝다. 유방(mamma), 젖꼭지(amma, mamilla)와 계열이 같다. 넥타이 구실이나 하는 칼은 칼집에서 녹슨다. 칼집 밖에서 따로 노는 칼은 처절하다. 어떤 부부는 1년에 칼을 세 번밖에 안 썼다고 법정에 선다. 딜레마의 반복이다.
성관계에 영원히 동의하는 계약이 결혼이지만(미래학자들은 결혼이 인간 본성에 역행하므로 사라질 제도라고 예언하지만), 폭행과 강제까지 동의한 건 아니다. 남편 L씨는 지명방어에 소홀한 부인 책임으로 돌리지만 내장한 ‘칼’만이 아닌, 과일 깎는 칼이 등장, 문제가 달라졌다. 칼집과 칼의 건강한 관계 회복을 바라며 호사의 소외지대, 성욕의 자투리땅을 더듬어봤다. 칼과 칼집을 잘 쓰자는 취지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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