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턴의 한 병원에 소아암에 걸린 숀 버틀러라는 7살 환자가 있었는데, 의사로부터 ‘가망이 없다’는 판정을 받고 병상에 누워있었다.
야구팬인 숀은 스테플턴 선수의 열렬한 팬이었기에, 숀의 아버지는 스테플턴에게 편지를 써서 스테플턴에게 보내게 된다.
▲ 이광진 대전경실련 사무처장 |
며칠 후 스테플턴은 병원을 방문하게 되고, ‘숀 내가 스테플턴이다. 내일 너를 위해 멋진 홈런한방을 날려 줄 테니까 희망을 버리지 마라’는 이야기를 남기고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그 다음날 스테플턴은 숀과의 약속을 지켜 멋진 홈런을 날려버린다. 숀은 병상에서 환호했고 그 뒤로 병세가 호전되어 5개월 후에는 암세포가 깨끗이 사라져 퇴원할 수 있었다고 한다.
‘희망’과 ‘기쁨’이 암세포를 죽이는 명약이 되었던 것이다. 사람에게 가장 무서운 병은 ‘절망’이고 이것은 악성 종양과도 같은 것이다. 이처럼 사람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나라의 여러 가지 상황들을 돌아볼 때, 희망 보다는 절망이 많은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듯하다.
끝 모르고 떨어져 내리는 여러 가지의 경제 지표들로부터 시작하여 개인 가정의 경제 상황까지 희망보다는 절망이 앞서는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요 며칠 우리사회를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의 구속 사태를 지켜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희망보다는 절망이 앞선다는 느낌을 더욱 더 갖게 되는 듯하다.
한 개인의 글로 인해 정부의 외환보유고가 20억 달러나 축났다고 하는 대목에 가서는 실소마저 금할 수 없게 된다. 우리나라 최고 수재집단이라 할 수 있는 행정고시 출신들과 최고 학력소지자들의 전문가 집단을 브레인으로 두고 있는 정부의 대응력이 한 개인의 능력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정부 스스로가 자랑스럽게 내어 놓는 듯한 모습 속에서 과연 우리는 희망과 기쁨을 찾을 수 있는 것인지?
왜 그토록 많은 시민들이 미네르바의 인터넷 칼럼에 열광하고 그를 추앙(?)하는 경지에까지 다다르게 했는지? 그 책임은 과연 누구의 책임인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의 세상을 우리는 누굴 믿고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어디 그뿐인가? 어떤 정치 지도자는 틈만 나면 경제위기를 벗어났다면서 투자하면 목돈을 번다는 발언을 하기도 하며, 그동안 우리나라의 심각한 문제점으로 지적되어오던 수도권 과밀화 문제를 풀기 위해 정부 스스로가 만들어 놓았던 수도권 규제정책을 철폐하는 것만이 국가가 경쟁력을 가질 수 있고 세계화되어가는 세상 속에서 이겨낼 수 있다면서 지역의 처절한 신음 소리는 철저하게 외면하기도 한다.
희망을 우리는 비전이라고도 하고 꿈이라고도 한다. 이런 비전이나 꿈이 없으면 그 사람은 살아 있어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고 고통의 나날을 보내야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꿈과 희망 그리고 기쁨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는 이미 발전할 수 없는 죽음의 사회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더 이상 정치권을 비롯한 정부 등이 시민에게 절망을 주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스테플턴 선수가 숀 버틀러에게 희망과 기쁨을 주고 그에게 새 삶을 주었듯이 국민 모두에게 희망과 기쁨을 주는 정책이 나오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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