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이 한심한 영혼아. 담배 끊기, 책 쓰기, 운동하기 등등 머리 속엔 새해를 겨냥한 이런저런 근사한 계획들이 떠오르지만, 지난해의 사정이 그러한데 올해라고 과연 별다를 수 있을까. 아무리 확고부동한 결심이나 약속도 나처럼 변덕스럽고 나약한 영혼에게서는 쉽사리 동요되고 마니, 셰익스피어가『햄릿』에서 노래한 꼭 그대로가 아닌가.
▲ 김운하 소설가 |
신라의 고승 원효에게 일어났던 일이다. 원효는 관음진신을 만나기 위해 바닷가를 가다가 처음에는 논에서 벼를 베는 여자를 만났고, 얼마쯤 더 가다가는 속옷을 빨고 있는 여자를 만났다. 하잘것없는 여자를 만났거니 생각했며 농이나 던졌던 원효는 나중에서야 그녀가 관음진신이었음을 깨닫는다. 이 이야기는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전하고 있는 것이다.
우연히 스치듯 만났던 인연이 보살님이거나 성인, 혹은 삶을 바꾸어 줄 운명의 사람일 수도 있는데, 우리는 언제나 너무 뒤늦게서야 그것을 깨닫는다. 한참 지난 후에야 지난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었음을 깨닫는 것처럼. 그런 ‘실패’ 자체를 운명이라고 받아들이면 그만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생과 사람에 대한 우리의 지혜가 너무나 일천한 까닭에 혹은 지금 현재라는 순간의 인연들을 가볍게 여기고 말기 때문에 그런 실패를 저지르는 것이다.
실은, 지나가 버린 것 외에도 바로 지금, 현재 자신이 소유하고 있거나 곁에 머물고 있는 인연들, 관계맺고 있는 존재들 모두가 한번 놓쳐버리면 영원토록 후회하고 슬퍼하게 될 그런 것들일 수도 있다. 그 모든 관계들을 인연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물론 그런 인연들을 놓치지 않고 붙잡아 둘정도의 지혜와 식견을 갖기에는 우리 삶이 너무 짧고, 세상은 너무 혼돈스러우며, 피상적인 감정은 너무 쉽게 우리를 사로잡고는 변덕스런 곡예를 부린다.
지나간 모든 ‘현재’ 들을 돌아보면서 그 무수한 현재들에서 나는 얼마나 많은 소중한 것들을 예사롭게 지나쳐버렸거나 간과했던가를 떠올리면 마음이 착잡해졌다. 그래서 나는 이 한해의 출발을 새로운 계획들을 구상하기보다는 지금 내가 맺고 있는 모든 관계들을 새롭게 돌아보는 것으로 시작하고 싶다. 이것도 계획이거나 결심이라면 물론 그렇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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