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너평 남짓한 교실에는 4명의 학생(?)들이 책상과 소파에 나눠 앉아 영어 발음 익히기에 한창이다.
중학교를 중퇴한 10대 소녀부터 학교 교문조차 가보지 못했다는 60대 아주머니까지 이들 학생들은 2008년의 마지막 주말을 야학에서 보내고 있었다.
한 평생 ‘공부’라는 꿈을 접지 못했던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40년만에 책을 잡다=초등학교 졸업 후 생활 전선에 뛰어들면서 어쩔 수 없이 학업을 포기한 이병훈(56.대전시 중구 문화동)씨. 그 동안 이 씨는 공사장 막일부터 운전기사, 가내 수공업 등 먹고 살기 위해 안 해본 일이 없다.
그런 이 씨였지만 얼마 전부터 몸이 나빠지기 시작해 급기야 병원 신세를 지게 됐다. 완쾌되지는 않았지만 그나마 병세가 호전된 이 씨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이 성은야학. 10여개월 전의 일이다.
“초등학교 졸업 후 15살 때쯤인가 영어책을 한 권 산 적이 있어요. 공부가 너무 하고 싶었는데 영어는 혼자하기 버거운 과목이더라구요. 할 수 없이 그 때 이후로는 공부를 못했죠.”
이 씨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하다보니 재미도 있고 자꾸 하고 싶더니 자연스럽게 대학이라는 목표가 세워졌어요. 세상이라는 게 혼자 살 수는 없는 것 아니겠어요? 2009년 새해에는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해 사람들과 함께 사랑도 나누고 도움도 나눌 수 있는 제2의 삶을 살아가고 싶어요”
▲“우리 딸은 의사, 아들은 영어 선생님”=해방 직후 태어났다는 60대 아주머니. 이름도, 사는 동네도, 태어난 고향도 비밀이다. 어렸을 적 6.25 전쟁이 터지면서 학교 문턱도 가보지 못했다고 했다.
지난 2년 동안 야학을 열심히 다닌 덕에 검정고시까지 통과했지만 신분을 밝히길 꺼려하는 아주머니의 가슴 속엔 여전히 ‘배우지 못한 한’이 깊게 남아 있는 듯하다.
하지만 “저 집 자식들은 잘 됐어”라는 주변의 말에 아주머니는 “우리 딸이 의사고 아들은 영어 선생님이여, 제대로 못 배워서 그렇지 우리 집안사람들 머리는 비상해”라며 “나도 야학 온지 이제 2년밖에 안됐지만 검정고시 다 통과했어. 앞으로도 부족한 거 더 배우기 위해 야학 계속 나올 생각”이라고 말한다.
“새해에도 우리 가족 모두 건강하고 하는 일 잘 풀리는 것”이 아주머니의 새해 소망이다.
▲“이쁨 받으니까 좋아요”=김은영(가명.17)양은 2년 전 다니던 중학교를 그만뒀다. 대전으로 전학 온 뒤 학교생활이 편하지만은 않았다고 한다. 한 동안 방황하던 김 양은 야학을 찾은 뒤 안정을 찾았다.
무엇보다 야학 선생님들의 관심과 같은 반 어르신 친구(?)들의 사랑이 기쁘다.
“솔직히 학교 다니는 아이들과 비교해서 성적이 떨어지는 건 아쉬워요. 하지만 같이 공부하시는 어머니들이 이뻐해주시고 선생님들도 많은 관심을 주셔서 좋아요” 김 양은 야학 생활에 만족감을 나타냈다.
“진짜 원 없이 놀았어요. 이젠 공부를 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또 하고 싶기도 해요. 학교 안 가고 집에서 놀 때 했던 컴퓨터도 실력이 많이 늘었어요. 꿈이란 꾸라고 있는 거라면서요. 컴퓨터와 관련한 멀티미디어 학과 같은 곳에 가는 게 꿈이에요”
▲“새해엔 꼭 대학생 됐으면...”=김점순(여.53.대전시 중구 대흥동)씨는 성은야학 졸업생이다. 하지만 부족한 영어 수업을 더 듣기 위해 주말인 토요일에도 야학을 찾았다.
‘아이들 대학 졸업 후 못 배운 한을 풀겠다’고 생각했던 김 씨였지만 막내딸 덕분에 그 한을 생각보다 일찍 풀 수 있게 됐다.
대학교 3학년인 딸이 야학 선생님으로 봉사활동을 하면서 어머니에게 힘을 줬기 때문.
지난 1년 동안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야학에서 공부를 해 온 김 씨는 현재 방송통신대학교에 지원한 상태다.
김 씨는 “뒤늦게 공부를 시작한다는 엄마를 격려해 준 아이들이 고마울 뿐이다. 낮에는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주말에만 나가도 되는 방통대에 지원해 놓은 상태다. 내년 2월쯤 결과가 발표되는데 꼭 붙어 내년에는 학교에 다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성은 야학을 이끌어가고 있는 백승룡(현직 대전 대신고 교사) 선생님은 “공부를 하고 싶어도 시기를 놓쳐 못하신 분들에게 성은 야학이 앞으로도 꿈을 이룰 수 있는 공간이 됐으면 좋겠다”고 밝혔다.[노컷뉴스신석우 기자/중도일보제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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