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장하기 전에 꼭 바틱 의상을 걸쳐야 했던 외국의 유명한 도박장을 ‘견학’한 적이 있다. 그런데 옷이 행동을 결정한다던가. 헐렁하고 부드러운 그 옷을 대여해 입고 들어서니 금세 노름꾼이라도 된 양 착각이 들기도 했다. 입는 옷과 행동은 자유로운 감성 이상의 어떤 연관성이 있다.
더욱이 옷이 정치적 이념의 기호라고 할 때, 흰색 셔츠에 검은 정장의 ‘블랙 투쟁’은 과격 룩(violence look)으로 비친다. 국회 규칙도 무시당하는데 복장 규칙을 가려 뭣할까만, 패션과 정치의 상관관계도 그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싸움질을 특권이나 특기로 생각하는 국회 모습과는 군복(전투복)과 군화(전투화)가 어울릴 분위기다. 행색들을 보면 아름다움이란 ‘이게 대체 뭐야?’라는 놀라움에서 생성된다는 견해에 동조하기 싫어진다.
과거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이 거미 모양의 브로치를 달고 중동전의 회담장에 나타났는데, 그 차림새는 거미줄처럼 얽힌 정치 상황을 풀겠다는 의지로 해석됐다. 그에 비해 다양한 공기가 함유된 국회 공간에서 대류로 인한 열 손실을 막기 위한 작금의 복장은 끝까지 붙어보자는 전투 복장이다. 선택의 길이 꽉 막힌 정치 현실에서 노타이가 타이의 재탄생이라는 철학 같은 건 비집고 설 틈이 없다.
문제삼는 복장의 문제는 실은 의식(意識)의 문제이다. 의복이 피부를 보호하는 수동적인 덮개가 아닌 다음에야, 패션에 대한 시각은 상이할 수 있다. 미학의 눈으로는 패션은 이상적 미의 추구이며, 경제학에서는 신상품의 추구 현상, 사회학에서는 사회적 동조 현상으로 규정할 수 있다. 정치학적으로 현재 국회의 패션은 다차원적 해석을 거부하는 막장 국회의 제멋대로 패션일 것이다.
친한 외국인들은 넥타이 잘못 맸어(Wrong tie!), 양복 잘못 입었어(Wrong suit!) 식으로 지적해주기도 한다. 국회를 안방으로 착각하는 의원들과 친해지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잘못된 옷차림만은 지적해주고 싶다. 편하면 그만이라는 발상은 버려라. 국민이 불편하다. 언제부터 옷 입기를 밥 먹듯 쉽게 생각했나. 정치를 옷 입고 밥 먹는 것보다 우습게 생각해 왔나. /최충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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