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종별 : 기념물 제26호
독립운동가와 역사학자이자 언론인으로 활약한 단재 신채호 선생의 생가는 대전시 중구 어남동 도리미 마을이다.
1880년 태어난 선생이 일제에 항거하다 중국 뤼순 감옥에서 순국한 게 1936년이니 일흔이 넘은 사람들은 잠시나마 단재와 동시대를 살았을 만큼 먼 옛날의 인물은 아니다.
올해로 탄신 128주년이 되고 순국한지 80년이 채 안된 단재의 생가가 우리지역에 있지만 이를 아는 사람들도 많지 않고 그에 대한 조명도 부족하기 짝이 없다.
일제로부터 압박과 설움을 받으며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조국의 독립을 외쳤지만 단재처럼 투철한 이론을 실천하고 끝까지 타협하지 않고 투쟁한 사람은 드물어 민족 자존심과 절개의 표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20여 년 전 돌덩이만 뒹굴던 콩밭에서 시민단체들이 찾아낸 그의 생가는 황량한 시골마을에 초가집 한 채 덩그러니 놓여있어 초라하기 이를 데 없으며 문풍지가 찢기고 비지정 문화재들을 분실하는 등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선생의 생가를 찾아 복원운동에 나섰던 옛터를 생각하고 돌아보는 모임 김세영 회장은 “1935년생인 나도 비록 기억은 없지만 단재 선생과 잠시나마 같은 세상에 있었다는데 새로운 느낌”이라며 “그나마 선생의 생가가 복원되고 동상도 세워졌지만 넓은 대지에 우람한 돌담이 선생의 가난하면서도 곧은 성품을 욕되게 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도리미 마을에서 출생한 단재는 초가집이 아닌 묘막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운 살림으로 콩죽만 먹었다고 전해진다.
유년시절은 사람에 있어 그의 전 생애를 지배하는 정서적 가치가 형성되는 중요한 시기로 단재가 수난과 역경 속에서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민족만을 생각하고 헌신할 수 있었던 것은 어려운 시절을 보내면서도 잃지 않았던 곧은 절개와 기개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라나는 어린이와 시민들에게도 위대한 인물이 태어난 집이 꼭 거대할 필요가 없다는 인식과 함께 외형이 아니라 그의 얼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만드는 게 단재 같은 위대한 인물을 배출한 대전시의 역할이다. /백남우 시민기자.영상 금상진 기자
※ 본 시리즈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 지원으로 이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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