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인사가 끝나자마자 마치 사무실에 출근하여 노트북을 켜듯 잠시의 지체도 없이 시작한 첫 곡에서, 그는 특별한 기교의 과시를 생략한 채, 천진난만한 담담함으로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풀어냈다. 이어진 슈만의 환상곡은 화려한 서주에서 지극히 고요한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피아노를 상대로 때로는 밀고 때로는 당기면서 한 편의 서사시를 낭송하는 듯 하였다. 눈을 감고 고개를 젖힌 스리쿼터 프로필로 객석을 향하는 등, 다채로운 몸짓 또한 무르익은 쇼맨십이었다.
2부 첫 작품은 치밀하게 준비한 중국음악 다섯 곡. 본인의 곡목해설을 통역하는 과정에 약간의 배달사고가 있었다. “첫 곡‘호수위의 달그림자’는 프랑스 인상파의 색채를 띤 곡”이라는 부분이 빠졌다. 본인이 탱고풍이라고 설명한‘봄의 춤’은 그대로 가사를 붙여도 좋을 만큼 멜로디에 흡인력이 강하고 완성도가 뛰어난다.
처음 듣는 곡이지만 완급의 조절 등 즉흥적인 프레이징과 애드리브 냄새가 물씬하여, 재즈피아니스트로서도 발군인 랑랑의 퓨전 능력을 엿볼 수 있었다.
정식 곡목 세 번째, 현대의 감각에 맞는 그라나도스의‘축하인사’에서는 교과서적 친밀감을, 바그너의 오페라를 비르투오소 리스트가 편곡한‘이솔데의 사랑과 죽음’에 이르러서는 마치 건반 위의 손가락이 죽죽 늘어나는 듯한 환각을 느꼈다.
마지막은 역시 연주가 무척 까다로우면서도 귀에 익은 리스트의 헝가리언 랩소디. 어쩐지 피아노가 작아 보인다. 랑랑의 특기인 엄청나게 빠른 타건이 종주부에 와서는 마치 무언어극‘난타’처럼 건반을 두들겨, 감정이 극도로 고양된 객석으로부터 탄성과 환호를 이끌어내며 연주를 끝냈다. 감기를 심하게 앓았다는 소문처럼 연신 땀을 닦으며 응해준 앵콜 곡은 쇼팽의 에튀드. 지극한 피아니시모에서 포르테까지 한 음도 빠뜨리지 않고 쏙쏙 스며드는 애조 띤 연주는 달아오른 객석을 다시금 정숙으로 되돌리기에 충분하였다. 민속음악과 앵콜을 포함한 일곱 토막의 레퍼토리가, 랑랑의 진면목을 차곡차곡 담은 포트폴리오처럼, 잘 짜여진 드라마였다.
바쁜 연주일정은 물론 세계적인 기업 십여 개에 광고모델로 활약 중인 현역 톱 랭커를 대전에 초청하기는 무척 어렵다. 대전보다 몇 배나 큰 도시가 경제위기와 환율급등으로 포기한 공연을, 엄청난 적자를 각오하고 초청한 (주)공간엔터테인멘트의 윤광열님과 몇 분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좋은 공연 뒤에는 숨은 일꾼들의 희생이 있는 것. 불황 탓인지 홍보 미흡 때문인지 꽤 많았던 오른 편의 빈 자리가 자꾸만 마음에 걸린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