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재 국악칼럼니스트 |
“신라 제49대 헌강왕(憲康王)이 울주(蔚州)의 바닷가에서 놀다가 돌아가려 할 때 동해용(東海龍)의 조화로 안개 속에서 길을 잃게 됩니다. 왕은 일관(日官)의 조언을 받아들여 용을 위해 망해사를 지으라고 명합니다. 그러자 동해용이 일곱 아들들과 함께 나타나 음악을 연주하며 춤을 춥니다. 왕은 동해용의 아들 중 하나인 처용을 데리고 돌아와 그에게 관직도 주고 아름다운 여인과 혼인도 하게 합니다.
어느 날 처용의 아내를 흠모하던 역신(疫神)이 그녀와 동침을 합니다. 집에 돌아와 현장을 목격한 처용은 노래를 지어 부르고 춤을 추며 물러나옵니다. 처용의 너그러움에 감복한 역신은 처용 앞에 꿇어 앉아 잘못을 빌며 앞으로는 처용의 그림만 보아도 그 곳을 범치 않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그 후 사람들은 처용의 그림을 문 앞에 붙여 사귀(邪鬼)를 물리치고 경사로운 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역신과 동침하였다’는 ‘역병에 걸렸다’라는 뜻이며, ‘처용이 춤추고 노래했다’는 역귀(疫鬼)를 쫓아내려고 ‘굿을 했다’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로 이 설화에서 구나의식(驅儺儀式)의 춤 ‘처용무(處容舞)’가 비롯됩니다. 처용무는 점점 나례(儺禮)의 경계를 넘어 오락적인 춤으로 변모해갔으며, 무용수도 한 사람에서 다섯 사람으로 증가한 ‘오방처용무(五方處容舞)’로 바뀌었습니다.
또한 조선 성종 때(1493) 편찬된 악학궤범(樂學軌範)에 의하면 다른 형태의 춤인 ‘학무(鶴舞)’ 그리고 ‘연화대(蓮花臺)’와 합쳐져 ‘학연화대처용무합설(鶴蓮花臺處容舞合設)’이라는 규모가 크고 화려한 정재(呈才)로 만들어집니다. 이 점이 우리 선인들의 탁월한 예술성을 감지할 수 있는 대목이지요. 오늘날도 뜻 모를 외국어가 붙은 남의 것을 모방하기 보다는 우리의 것을 때와 상황에 맞게 재구성할 수는 없을까요?
노루꼬리 만큼 남은 올해의 끝자락에 처용무가 문득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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