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인권선언의
▲ 박찬인 충남대 교수 |
아무리 여러 번 읽어보아도 싫증나기는커녕 오히려 가슴 뿌듯한 덕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인류사회의 기본 공리가 이렇게 새삼스러운 것은 왜일까. 아마도 삶에 쫓겨 이것을 잊고 지냈거나, 혹은 특정한 시공간 속에서 이를 무시했거나, 그것도 아니면 현실을 모르는 책상물림의 말장난이라고 일축하는데 동조했거나 했던 탓은 아닐까 자문해 본다.
지금부터 220년 전인 1789년, 프랑스혁명 당시의 인권선언 제 1조도 “인간은 나면서부터 자유로우며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라는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사실 인류가 현재 공유하는 모토 자유, 평등, 우애(형제애)는 프랑스 혁명을 통해 보편화됐다고 말할 수 있다. 자유가 끝까지 보장되면서도 평등한 사회, 평등이 담보된 상태에서도 개인의 자유에 따라 차이가 있는 사회야 말로 인류가 추구하는 이상적 사회일 것이다.
그러나 자유와 평등이 정말 동시에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존재한다. 현실적 상황에서 자유와 평등이라는 것이 사회통합의 대원칙이라면 이 양자 사이에 있을 수 있는 갈등관계를 조정하고 보충하는, 그러므로 더욱 필요한, 가치가 ‘우리가 형제자매’라는 형제애 곧 연대의식일 것이다. 연대의식은 구성원 상호간의 책임감, 서로에게 관심과 배려를 가지게 하는 형제애적 연결의식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사회에서는 자신이 자유를 누리듯이 “타인이 사유하고 행동하는 방식을 존중하고 타인의 정치적, 종교적 견해와 믿음의 자유를 인정”하는 데 익숙하다. 개인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다름’을 인정하고 다양성을 포용하니 그게 곧 관용의 마음, ‘똘레랑스’이다.
또한 평등, 즉 분배의 정의를 위해 단행하는 파업이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이기 때문에 파업세력이 주는 불편함에 대하여 불평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요구와 주장에 먼저 귀를 기울인다. 파업이란 애당초 시민에게 불편을 줌으로써 자기를 봐달라고, 귀 기울여달라고 하는 것이므로, 파업에 대체인력을 투입한다는 것은 법으로 금지돼 있다. 따라서 프랑스에서는 경찰도 파업하고 공무원이나 교사조차도 수시로 파업을 한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프랑스 사회를 견고하게 지탱하는 또 다른 하나의 덕목으로서 연대의식이다.
수능성적에 따라 희비가 교차하는 가운데 여기 저기 기웃거리며 눈치작전으로 지원 대학을 선택하는 학부모와 수험생, 촛불의 권리나 엠네스티의 우려와 권고를 일축하는 정치인, 기득권과 수도권 살리기에 초점을 모으는 행정관료, 노동자와 고용인의 정당한 요구를 묵살하는 기업가, 교육을 방기하는 교육자, 머릿속이 오로지 돈으로만 꽉 찬 사업가, 이들 모두에게 어제는 어떤 의미를 갖는 날이었을까. ‘인권선언’이 있음을 알기나 할까. 아니 인권을 배우면서 새겨본 적이나 있었을까. 어려울수록 필요한 것이 공동체정신으로서 연대의식이고 어두울수록 가슴에 새길 것이 인권선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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