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을 하고 캔 맥주 하나를 땄는데 다 마시지 못해도, 나머지를 마셔줄 사람이 있다는 것.’ 자신이 아닌 무엇으로 변해가는 감각. 아무것도 막을 수 없고, 도저히 돌아갈 수 없는 불안하지만 감미로운 공포. 그 불가사의하고 성가신 존재 앞에 흔들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바로 요즘,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에쿠니 가오리의 신작 소설 <장미 비파 레몬>이다. 이 책은 출간 2주 만에 소설 8위에 오르며 인기 상승을 예감하게 한다.
이 책의 저자 에쿠니 가오리는 이미 많은 베스트셀러를 만들어내면서 우리나라에도 수많은 팬들을 확보하고 있으며 청아한 문체와 세련된 감성화법으로 우리나라 여성독자들에게 폭발적인 사랑을 받는 에쿠니 가오리는 미국 델라웨이 대학을 졸업하고 1989년 <409 래드 클리프>로 페미나상을 수상하면서 문단에 혜성처럼 나타나 92년 <반짝반짝 빛나는>으로 무라사키 시키부 문학상을 수상했고, <냉정과 열정사이 Rosso>, <낙하하는 저녁>, <도쿄타워> <홀리 가든>등으로 한국 독자들을 사로잡은 일본 최고의 감성작가이며, 요시모토 바나나, 야마다 에이미와 함께 일본의 3대 여류작가로 불리며 3대 여류작가중 국내에서 최고 인기작가로 군림하고 있다.
이 책을 읽어보신 많은 분들이 이 책을 끝까지 읽어도 장미 비파 레몬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는 분들이 많았는데, 이 제목의 의미는 이 꽃들의 꽃말을 알면 조금은 이해가 쉽다.
장미는 사랑의 맹세, 정열적인 사랑을 의미하며, 비파는 악기 이름이 아니라 비파나무를 의미하며 현명한 사랑을 의미한다. 그리고 레몬은 성실한 사랑, 정절을 의미한다.
이 소설에서는 주부, 잡지 편집자, 꽃집 주인, 회사원, 모델, 학생 등 9명 여성의 수많은 역할과 관계를 다루면서 이들 모두가 각자의 일상에서 질서 정연하고 착실하게 주어진 역할을 수행한다. 한없이 평범하고 행복해 보이는 일상 안에서 수없이 많은 상념과 감정들이 소용돌이친다. 그리고 그런 상념과 감정은 때로, ‘비일상’을 낳는다. ‘비일상’은 ‘사랑’으로 이어지고, 그 사랑 앞에서 이들은 무기력하고 무질서하게 흔들린다. 에쿠니 가오리는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에 위태롭게 서 있는 9명의 여자들을 통해 ‘사랑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절대로 친절한 권유는 아니다. 이들이 보여주는 사랑은 이기적이어서 행복해지기도 하고, 희생적이어서 불행해지기도 하는, 달콤하지만 쌉쌀한, 지극히 현실적인 사랑이다.
이 책의 등장인물을 중심으로 내용을 살피자면 다음과 같다. 미즈누마-도우코-곤도 신이치
소설에서 가장 처음 언급되는 주인공인 도우코와 미즈누마 부부다. 도우코는 오랫동안 사귀던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미즈누마와 결혼하였다. 미즈누마는 까탈스러운 성격에 홍차를 좋아하며, 저녁에 프라모델 같은 걸 조립하면서 늦게 밖에 나가려는 아내를 못마땅해하는 스타일.
자신이 먹는 과자가 떨어지면 성질도 낸다. 도우코는 케니 지를 들으면서 가슴이 찡해지는 사람이며, 꽃을 좋아해서 에미코의 꽃 가게에서 꽃을 자주 산다. 결혼하기 전에는 애견미용사였으며, 검둥이라고 불리우는 강아지를 기르며, 남편에게는 지극히 소심한 태도를 보인다. 남들이 보기에는 평범한 부부일 뿐만 아니라, 사이가 좋지 않으면 미즈누마는 도우코가 좋아하는 꽃집(에미코의 꽃 가게)에서 꽃을 배달시키거나 꽃을 사가기 때문에 마치 완벽한 부부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레이코-츠치야-에리-사쿠라코
회사에서도 일을 잘하고, 바깥 활동도 열심인 레이코. 발이 넓어서 자신의 친구인 도우코에게 미즈누마를 소개시켜주었다. 사람들을 모으는 것을 좋아해서 자신의 집에서 파티를 만들고 사람들과 시끌벅적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남편 츠치야와는 별로 그렇지 못하다. 남편 츠치야는 집을 하숙집처럼 여기는 사진 작가이며 거의 대부분의 생활을 밖에 있는 츠치야의 작업실에서 생활한다 (사진 작가라는 존재는 만화나 책에서 이런 식으로 많이 묘사된다).
둘은 마치 완벽한 한쌍인 듯 보이지만, 결국 그 둘 사이에는 아무런 이야기가 없다. 레이코는 츠치야가 왜 그러는지, 혹시 밖에서 다른 여자를 만나는 지 궁금하거나 따지고 싶긴 하지만, 자신이 남편에게 목매는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 자기 자신에게 각인시키기 위해 츠치야에게 묻지 않는다.
이처럼 9명의 주인공들이 서로 물고 물리는 연관관계를 가지면서 사랑에 대한 정의를 파헤치는 이 소설은 <도우코와 미즈누마의 일상을 그린 단락>을 통해 한층 그 깊이를 더해간다.
<레이코의 집까지 전철을 한 번만 타면 된다. 도우코는 미즈누마와 함께 전철 타는 것을 좋아한다. 평소에는 차를 타고 외출하는 일이 많지만, 가끔 이렇게 같이 전철을 타면 부부답다는 기분이 절로 든다. 도우코가 입는 옷은 대개 미즈누마가 고른 것이라서 두 사람의 옷차림이 균형감 있다. 차창에 비친 부부의 모습이 그런대로 괜찮다. 게다가 함께 나갔다가 함게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은 도우코의 마음에 늘 안심을 선사해준다.
“참 이상하지.”
소우코의 거북함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미치코는 말했다.
“다들,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는 함께하지 못하는 것 같아.”
“네?”
폭탄 발언이었다.
“그래도 세월이 흐르고 나서는 오래도록 함께한 사람을 가장 사랑했다고 생각하게 되겠지, 아마.”
후회 비슷한 감정에 휩싸일 것도 알고 있었다. 아침에 눈을 떠도 혼자, 밤에 잘 때도 혼자, 크리스마스나 새해 인사를 해줄 상대도, 생일을 축하해줄 상대도 없다. 목욕을 하고서 캔 맥주 하나를 땄는데, 다 마시지 못했다고 나머지를 마셔줄 사람도 없다. 알고 있었던 일이다.>
많은 분들이 경제난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사랑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며 서로 보듬어주고 이해하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보다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는 작은 소망을 가지고 이 책을 소개한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