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윤발의 살인 미
▲ 조태준 연극연출가·배재대 공연영상학부 교수 |
헌데 이 영화 ’영웅본색’의 영어 제목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내 미니 홈페이지 표제어로도 사용되고 있는 그 제목은 바로 ‘A Better Tomorrow’! 직역하면 ‘보다 나은 내일’이다. 죽이고 부수는 갱영화의 제목치곤 좀 지나치다는 생각도 들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영화 속의 그 어떤 기호와 이미지보다도 이 제목을 숭배한다. 그렇다. 나의 삶에서, 아니 우리 모두의 삶에서 ‘보다 나은 내일’을 배제한 그 어떠한 목표도 현실성을 얻기는 힘들다. 아이를 키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작품 활동을 하는 내 모든 삶의 일들이, 행여 여하한 속물적 이해관계와 결부되어 있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보다 나은 미래를 지향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그러나 ‘보다 나은 내일’은 막연히 지향한다고 해서 저절로 구현되는 현실이 아니다. 우리의 오늘이 뭔가에 탕진되고 있을 때, 흔히 그렇듯이 꿈은 과거형이 되고 미래에 대한 의지는 저당 잡힌 자산으로 전락하게 마련이다. 누가 과연 우리의 삶을 태엽 감긴 인형에 비유할 것인가. 희망을 확대 재생산하지 못하는 현실은 더 이상 보다 나은 미래를 잉태하는 오늘일 수 없다. 우리의 소중한 내일은 그저 ‘생각대로 하면 되는’ 그 무엇이 아니다. 내일을 준비한다는 것은 일단 무분별한 여유보다는 성찰이라고 하는 사고의 긴장감을 전제로 한다. 탕진은 바로 이러한 긴장감이 결여될 때 특유의 관성력을 발휘하게 되는 삶의 소비 양태이다. 그리고 그것이 더욱 위해한 이유는 미덕의 세계에서 제격과 파격에 대한 우리의 판단력을 송두리째 앗아간다는 데에 있다.
2008이라는 낯선 시간의 집이 겨우 익숙해질 만한데, 언제부턴가 그 집이 지겨워지는가 싶더니 이젠 아예 회한이라는 감정까지 들고 일어나 온갖 변덕을 부린다. 촛불시위와 그 불꽃에 반사된 우리의 자화상을 가늠하느라 우리 모두 오만상을 찌푸리던 때가 언제였던가. 지난 여름 올림픽이 정말로 열리긴 했었던 걸까.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의 금메달 획득수도 벌써 가물가물해진다. 이게 다 상상초유의 글로벌 경제위기 탓이렷다. 물론 위기라고 해서 내일이 없는 건 아니다. 고통이 내재되어 있다고 해서 그 내일이 소중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문제는 내일을 맞이하는 오늘 우리의 마음가짐이다. 우리는 정작 믿고 있는 걸까? 보다 나은 내일을. 우리 모두가 참고 견디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는 사실을.
아아, 세월 가고 나이 먹는 일에 언제쯤 초연해지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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