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백겸 시인·한국작가회의 대전·충남회장 |
우리의 시각 청각 촉각은 전부 파로 전달된 에너지차이를 뇌가 인식하면서 정보의 결합으로 한편의 작은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작은 이야기의 결합이 큰 이야기의 이미지와 꿈을 만들어낸다. 우리의 뇌는 거의 이십사시간 꿈꾸면서 꿈의 내용을 영화처럼 우리가 현실이라 여기는 외부스크린에 투사하는데 의식이 각성상태에서 집중적으로 콘트롤하는 꿈이 현실세계이다(인간의 입장이며 개나 새 벌레의 현실은 파장의 인식범위가 다르므로 물론 다르다).
초점이 맞추어지지 않은 흐릿한 눈으로 본 정보들이 무의식이라 부르는 마음의 창고에서 춤추며 돌아다니는데 시인은 백일몽에서 마음이 원하는 풍경과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춤을 추어야한다. 무당이 트랜스상태에서 신의 소리를 듣듯이 시인은 춤에 들떠서 어두운 마음의 심연에서 이미지를 건져내 춤인 운율에 얹어놓는다.
춤과 운율은 결국은 리듬이며 드러난 波高와 드러나지 않는 波低로 이루어졌는 세계가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파동을 사용하기 때문에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무의식적으로 배운 질서의 형식이다. 시란 어떤 마음의 꿈(세계 인식)을 언어이미지와 운율리듬의 이중주로 和音의 조화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시인들의 꿈이 배합된 칵테일 맛은 국적과 산지에 따라 다른 포도주처럼 다양하지만 결국은 독자의 입맛이(시간이라는 미래의 독자까지 포함해서)명품을 결정한다.
하루는 밤과 낮으로 깜박이며, 일년은 四時로 깜박이며, 지구의 세차운동으로 황도의 별들은
26,000년을 주기로 위치를 바꾸며 시야에 드러났다가 사라진다. 우리도 지구에서 목숨을 받아 꽃처럼 피었다가 어둠으로 진다. 결국 긴 시간 속에서 깜박이는 존재다. 긴 리듬과 짧은 리듬이 우리의 심장과 영혼을 흔들고 우리의 마음속에서 솟구치는 희로애락의 변주와 리듬은 몸을 받아 시와 음악과 춤으로 나온다. 詩歌舞가 하나인데 요새 시는 노래와 춤의 기능을 잃어버려서 지나치게 이미지기호에 의존해있다. 언제부터인가 시란 온전한 세계를 그려내지 못하는 반쪽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인간의 이성과 주체를 지나치게 강조한 근대문화사조의 영향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늘에서 별들이 깜박깜박
우주 알들이 부화해서 병아리처럼 시공의 마당을 돌아다니다가
어른 닭이 되면 새 알을 낳고 끓는 시간에 삶아져
식탁에 오르는 양계왕국
(그토록 사랑했던 밤하늘이 계란과 닭의 우화에 불과할 줄이야
별들도 사라지고 시간은 영원하네)’
졸시 “깜박 깜박”을 인용해서(피 같은 신작이 산문으로 추락했다) 잡다한 생각을 늘어놓은 이 글을 마무리한다. 가로 안의 표현은 대중가요 옛 노래를 어느 시인이 패러디한 시를 잡지에서 보고 멋있어 보여서(노래방에서 가끔 부르는 노래이다) 나도 같은 형식으로 재차 패러디 해서 써 본시다. 이 글을 사무실에 쓰면서도 글의 꿈에 젖어 있다가 전화가 오면 깜짝 놀라 현실로 돌아오고 꿈과 현실을 왔다갔다하니 깜빡거리는 내 의식을 들여다보는 또 하나의 의식이 말한다. “정신차리고 빨리 끝내. 원고 마감 일이 오늘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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