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명현 한국주택금융공사 대전지사장 |
100년 전통의 야마이찌증권이 파산하면서 일본이 충격에 휩싸였다.
경영파탄의 책임을 지고 사장이 흘린 눈물 때문이었는지 증권사에 대한 비난도 잠시, 세계 제일의 부국이었던 일본이 하루아침에 왜 이 지경이 되었냐는 반성과 함께 침울한 분위기 일색이었다.
일본은 80~90년대에 오일쇼크와 엔고현상을 극복하면서 장기호황에 방대한 무역흑자를 누리고 있었다.
넘치는 달러로 록펠러센터 등을 사들였고, 세계 10대 은행에는 예닐곱 개의 일본은행이 늘 포진해 있었다.
그랬던 일본이 하루아침에 위기에 빠져들었다는 사실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당시의 상황을 분석하면서 오마에 겐이찌는 “앞으로 당분간 일본은 없다. 어디 가서 일본식이라는 얘기는 꺼내지도 말라”고 크게 꾸짖었다.
분명 일본은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제일의 제조업 강국이지만 새로운 밀레니엄시대는 이런 굴뚝산업의 시대가 아니라 정보지식산업, 금융서비스산업의 시대이므로 획일적 사고보다는 다양하고 유연한 창조적 사고로 전환해야 한다고 부르짖었다.
한마디로 백기 청기 다 들고 오로지 미국적 가치와 시스템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은 이후 버블경제의 후유증으로 소위 잃어버린 10년을 겪었고 아직도 그 후유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다.
10년이 흐른 지금, 그때의 혼란스러움이 다시 엄습한 것 같아 착잡하다. 우리 역시 그동안 IMF의 멍에에서 벗어나고자 온갖 고통을 감내하였다.
소위 글로벌화에 편승하여 많은 고유가치를 포기하면서 낯선 미국식 제도를 도입하고 익숙해지고자 노력해왔다.
고용시장의 붕괴를 알면서도 시장을 활짝 개방하여 대외의존도를 90%까지 높였고, 미국과의 FTA 체결에도 앞장섰다.
미국을 알아야 살아남는다 해서 한글 회사명도 영문 머리글자로 바꾸고, 알록달록한 레게 파마에 알 수 없는 랩에 열광하는 젊은이들도 마냥 귀엽게 봐주고, 기러기 아빠들의 애절한 사연 속에서도 7만 명에 달하는 유학생이 미국에 머물도록 했다.
오로지 달러를 들고 있어야 한다 해서 2천억불이 넘는 달러를 중앙은행 금고에 쟁여놨었다. 그랬는데 이제 와서 미국이 다가 아니란다.
당혹스러운 것은 과거엔 그래도 무조건 미국만 따르면 된다는 식이었는데, 지금은 방향을 찾기가 어렵게 되었다는 점이다.
한미FTA는 물론 앞으로도 계속 달러만 좇을 것인지, 자본시장통합법을 밀어붙여 금융빅뱅을 겪어야 하는지, 쌀시장은 2015년에 완전 개방해야 하는지 혼동의 연속이다.
다만 소위 글로벌 스탠다드(Global Standards)라는 것의 실체는 분명해졌다.
그것은 결국 미국을 위시한 거대자본가들의 머니게임을 위해 국경을 초월한 시장참여를 허락하되, 게임의 룰은 자기네들이 익숙한 방식으로 통일시키라는 강자의 논리에 다름아니었다.
과연 우리는 이 판에 껴서 얼마만큼을 얻어냈다는 것인가. 상황이 재미없다 싶으면 그들은 얼마든지 판을 홱 바꾸고자 할 것이다.
그 자신 금융자본의 최대수혜자인 소로스는 이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고 한다.
2차 대전이래 반세기 넘도록 미국이 누려온 신용팽창시대가 드디어 종지부를 찍게 됐다는 것이다. 세계가 이제 더 이상 달러만을 추구하지 않을 것이며, 중국의 부상 속에 다극화 시대의 도래가 예상된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로서도 처음 겪는 일이 될 것이다.
제 앞가림에 바쁜 미국이 자국산업의 보호를 외치는 와중에 당분간 우리 원화가치가 자리를 잡기까지 혼란이 지속될 것 같다.
소로스가 금융시장의 고통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가운데, 실제로 불황의 늪이 깊어만 보인다. 위기 시에는 전과 다른 새로운 가치관과 모럴이 필요해진다.
모두의 양보와 희생 속에 진정으로 우리에게 어울리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무엇인지 다양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이를 수렴하려는 노력이 절실하다.
북한에 퍼준 돈이 아깝다며 이념에 매달리고, 수도권 편집증에 종부세 타령으로 끊임없이 갈등을 양산하는 소아병적 사고와 낡은 정치 안목으로는 위기 극복의 길을 찾아내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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