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문순 중구 목동 |
이러한 엄격한 훈육 속에서‘현모양처’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싹을 틔었고, 이는 어느덧 성장을 하고 있는 내 삶에서 하나의 목표로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이런 나의 어린 시절, 닮고자 했던 큰 바위 얼굴은 지금은 고인이 되신 육영수 여사였습니다.
결혼 후 집안에 있기를 바라는 남편의 뜻에 따라 고향이었던 인천에서의 직장을 접고 대전에서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남편을 위하는, 아이들을 위하는, 그리고 그런 아내가 되는 것이 행복이라고 느끼며 한 여자가 아닌 누구누구의 엄마로 나를 잊은 채 결혼생활을 했습니다.
하지만 큰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강물처럼 조용히 흘러가던 나의 생활에 조약돌 하나가 던져져, 작은 파장이 생겼습니다. 학교 주부교실에 가입 신청서를 내면서 내 이름 석자를 되찾았습니다. 회의를 알리는 안내장의 노란 봉투에 ‘정문순’이란 나의 이름이 적혀서 배달되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주부교실 도마초등학교 부회장 2년, 분회장 1년을 지내면서 치열하기로 소문난 주부교실 체육대회에서 응원상과 교육감상, 서부교육장 상을 타는 기쁨을 맛보기도 했습니다.
주부교실 활동 내내 열심히 도와주었던 남편은 아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사회활동을 그만 하기를 원했습니다. 다시 가정에서 자신과 아이를 보살펴주기를 원하던 남편의 생각이 바뀐 것은 1997년 우리나라가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이후였습니다. 아내가 가정살림을 잘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잠재능력도 발휘하고, 가정경제에 보탬이 되는, 미래를 위한 준비를 해 주길 바랐습니다.
그래서 공인중개사 시험에 도전했습니다. 많던 모임도 뒤로 하고 오로지 공부만 전념했던 2년이란 시간이 지금의 나를 있게 했습니다.
응시자 중 1%도 안 되는 합격자를 배출한 15회 시험, 처음 응시한 이때는 미역국을 먹었고 16회 때 여유롭게 합격했습니다.
겨울은 비수기니 쉬었다 봄부터 하라는 경험자의 말을 뒤로 하고 현장에 뛰어들었습니다. 처음 시작한 일은 원.투 룸을 중개하는 일이었습니다.
손님이 찾아오기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닌, 건물주에게 전화를 걸어 물건을 찾고 싼 물건으로 광고를 내서 손님과 직접 부딪히는 일이었습니다.
사람 상대하는 것이 두려울 것이 없던 나였는데도 처음에는 막상 손님이 오면 머리가 하얗고, 아무생각이 나지 않았던 시기를 지나 아파트 단지, 재건축, 재개발 지역, 상가 지역까지 3년이란 경험을 쌓고 지금은 대흥동에 ‘푸른솔 공인중개사 사무소’란 간판을 걸고 직원 3명과 함께 1년여 동안 영업을 하고 있습니다.
주로 중앙로 지하상가와 은행동, 대흥동 상가를 전문으로 하고 있습니다. 원도심이라서 텅 비어있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중앙로 지하상가에는 항상 손님들로 북적이고 있습니다. 문제는 10여년 넘게 하고 있는 부동산이 5개나 되는 시장에 신출내기인 내가 터를 잡았다는 것이 부담으로 다가왔습니다.
특히 가게를 그만 두려고 내놓았다는 소문이 돌면 손님이 줄어들 것을 염려해 거래하던 부동산에만 가게를 내놓는 분위기 때문에 고객 유치가 쉽지 않습니다. 지금도 가장 힘든 부분은 점포주들과 친분을 쌓는 것입니다. 일부러 상인대학에 동참해 점포주와 사이를 좁혀보려고 노력했고, 지금도 매일 오후 2시 이후엔 지하상가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이제는 점포주들이 “인상이 장난칠 것 같진 않네.” “정확할 것 같아.” “야무지게 생겼네.”하며 저를 인정해 주시는 점포주들을 만날 때면 힘이 납니다. 지금은 씨를 뿌리고 있지만 언젠가는 이 씨가 싹이 틀 날이 올 것이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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