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선생은 1888년 23세로 무과에 급제해 정삼품까지 올랐지만 일제침략이 본격화되자 관직(동래경무관)을 버리고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기위한 국권회복운동에 투신했다.
일제가 대한제국에 을사5조약을 강제 체결하는 등 침략을 노골화하고 경제수탈을 가속화하자 선생은 대구 광문사를 서상돈 등과 만들어 일본의 국채 1300만 원을 상환하는 범국민운동을 전개한다.
선생은 국권회복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민중계몽과 교육이 급선무임을 주장하고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교남교육회 등 학회에 참여하고 1914년께 중국으로 망명해 일신학교를 설립해 민족교육에 전념했다.
1920년에는 재일본 동경유학생들과 함께 2·8독립선언 1주년을 맞이하여 제2의 3·1운동 거사를 계획해 국내에 격문과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등 활동을 전개하다가 일경에 체포되기도 했다.
노동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에도 투신해 노동단장, 조선노동대회 전국연합회 회장 및 경성본부장으로 활약했으며 1920년 55세를 일기로 순국했으며 지난해 독립지사 김광제 추모사업회가 발기됐다. /맹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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