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히 자는 섬’이라 이름 붙여진 충남 태안군 ‘안면도(安眠島)’. 천혜의 자연 환경을 배경으로 평온히 잠들어 있던 이 땅에 1990년 11월 ‘불면(不眠)’의 밤이 찾아온다.
주민들이 바리케이트를 치고 3000여 명의 경찰 병력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은 ‘계엄’이나 ‘민중봉기’ 상황을 방불케하고 있었다.
1990년 11월 8일. 이 땅에 핵폐기물처리장이 지어질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진지 일주일째, 주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고 있었다.
이 섬을 육지로 연결해 주던 유일한 길인 안면연륙교 폭파와 독극물 살포 등 흉흉한 소문이 나돌았다. 비장한 기운과 ‘전운(戰雲)’마저 감돌았다. ‘11.8 안면도 항쟁’으로 불리는 안면도 핵폐기장 반대 시위는 그렇게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 1990년 11월 중도일보에 보도된 안면도 핵폐기장 반대 운동 당시 사진 |
안면도에 세계적인 국제 휴양지를 조성하겠다는 충남도의 계획이 발표된지 얼마되지 않아 전해진 이 소식에 주민들은 반발을 넘어 충격과 ‘배신감’을 표출했다. 주민들 뿐아니라 정치권과 전문가들도 크게 반발했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계기로 활발히 움직이고 있던 국내 반핵운동 진영도 결집하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생업을 포기한 채 투쟁위원회를 조직해 반대 시위에 나섰고, 학생들의 등교거부 등 집단 행동으로 이어졌다. 시위가 주민들의 생존권 투쟁을 넘어서 반핵운동으로 이어질 조짐을 보이자 당시 심대평 충남지사와 정근모 과기처장관은 뒤늦게 보도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며 해명에 나섰지만 주민들의 분노를 가라앉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1월 7일, 안면도에 계획되고 있는 것은 서해안과학산업단지와 함께 구상 중인 중간 저장소 일뿐 영구처분장이 아니라며 강행 의사를 비친 과기처 장관의 발표는 주민들의 반대 투쟁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11.8 항쟁’과 끝나지 않은 싸움=주민들의 분노와 반대는 서산과 태안 전역을 비롯해 홍성 등 인근 지역으로까지 확대됐다. 11월 8일, 극단으로 치닫던 주민들의 분노는 격하게 표출됐다.
경찰과의 대치 상황에서 투석전이 시작됐고, 신임 경찰지서장이 타고 있던 차량과 경찰지서, 휴양림 조성현장사무소, 예비군부대 무기고 등이 불에 탔다. 일부 공무원 등이 폭행·감금되고, 소방차와 쓰레기차 등이 탈취당했다.
주민 1만 여명 이상이 참여한 것으로 알려진 밤샘 시위는 다음날 새벽 23개 중대 3000여명의 경찰병력이 투입된 기습작전으로 주민 60여 명이 연행되고, 시위대가 해산되면서 막을 내렸다.
일단 진정 국면에 접어든 시위는 같은날‘주민들의 오해가 풀릴 때 까지 모든 신규 시설 계획을 보류하겠다’는 충남지사와 과기처장관의 유보 및 백지화 발표가 이어지면서 일단락된다.
당시 우려됐던 연륙교 폭파나 독극물 살포 같은 극단적인 ‘소요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으나, 후일 이 같은 계획이 실제 주민들 사이에 오고 갔음이 전해지기도 했다.
이 사건은 ‘제2의 광주항쟁’으로 비유될 정도로 국내 반핵운동사에 큰 획을 긋는 사건이자, 한국 현대사를 뒤흔든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 사건으로 당시 정근모 과기처장관이 취임 1년도 안돼 경질되는 등 후폭풍도 만만치 않았으나, 주민들의 싸움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주민들의 상처가 채 치유되기도 전인 다음해부터 또 다시 관련 조사와 주민들에 대한 회유 등을 통해 조심스럽게 안면도 핵폐기물처리장 추진 움직임이 끊임없이 제기되면서 주민들의 지난한 싸움이 시작되기에 이른 것이었다.
주민들의 분열 등을 거치며 1992년 5월 다시 한차례 격렬한 반대 운동이 일어났고, 주민들에 대한 회유가 있었다는 양심선언이 터져나온 1993년에 가서야 정부의 실질적인 철회 입장이 나오면서 이 오랜 싸움은 끝을 맺는다. /이종섭 기자 nom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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