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택 문학평론가·목원대 대학원장 |
이에 필자의 스승인 雲堂 구인환선생의 유년 시절에 얽힌 일화는, 독서에 대한 애잔한 향수마저 불러일으키곤 한다. 6·25 전쟁이 나기 직전에 학창시절을 보낸 선생에게 있어 그 시절은 문학에 대한 열정과 꿈이 움터 한창 성장해가던 무렵이었을 것이다. 도서관도 서점도 드물어 책이 귀했던 시절. 책을 사보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을 테고, 책을 많이 가지고 있는 친구에게 엄동설한 눈발을 헤치고 산을 넘어 이광수의 「사랑」을 빌려오는 길은 요즘으로 치면 흡사 생명을 담보로 하는 길이었으리라 짐작된다. 돌아오는 길에 눈발이 거세지고 눈에 파묻혀 빌려온 책을 놓치고 말았으니, 요즘이라면 그게 뭐 대수이겠냐 마는 잃어버린 책 한 권에 처절하게 절망하는 선생의 모습이 그가 걸어온 문학 인생을 증명해 주고도 남음직하다.
스스로의 모습을 반추하고 되짚어 보는 일. 우리는 일상에서 얼마나 자주 스스로의 모습과 마주하는가? 혹 마주한다면, 그 모습은 진정한 자아의 모습일까? 아마도 그것은 일에 쫓기거나 이기심에 충만한, 혹은 시기와 질투로 얼룩진, 나 스스로가 원해서라기보다는 사회적 요구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응하게 되는 왜곡되고 변질된 자아상이 대부분일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너, 즉 타인과 관계 맺으며 살아간다. 사회생활, 나아가 삶이란 결국 타인과의 관계맺음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그 관계맺음은 일종의 소통일진대, 스스로의 모습을 바로 알 때라야 만이 타인과의 대화와 소통도 온전히 가능할 것이다. 스스로를 바로 바라볼 수 없는데, 어떻게 타인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겠는가?
스스로의 모습을 바로 아는 것은 자기비판 및 반성을 통해 가능하다. 이는 삶의 방식 및 태도와 관련되는데, 운당이 터득한 삶의 방식이란 ‘사루비아 정열’로서 삶의 ‘벽돌’을 자율적으로 차곡차곡 쌓아가는 과정이다.(「자율적으로 벽돌을 쌓으며」) 자율적인 삶의 자세란 송사리 떼처럼 무조건적으로 남을 흉내 내고 목표만을 좇는 삶을 버리고, 벽돌공이 하나의 집을 짓기 위해 벽돌을 하나씩 천천히 쌓아올리듯이 우리도 삶에의 진정한 신념과 열정으로 만들어진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올려 ‘인생’의 집을 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자세를 통해,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되며, 진정한 자아를 직시하고 마주하는 삶, 곧 스스로와 하나 되는 삶을 이룬다. 이렇게 볼 때, ‘스스로와의 하나 됨’의 과정은 한 개인이 삶의 각종 단맛과 쓴맛을 경험하면서 본인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그가 첵카 노릇을 하며, 고통스런 현실을 온몸으로 감내해야 했던 대학 시절, “갑판의 한 구석에서 미군이 준 칠면조에 맥주를 마시면서 환한 화물선의 불빛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바라보며” 했던 다짐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본다.
“넌 알아야 돼. 최후에 웃는 자가 승리자라는 것을. 맞아, 나는 최후에 웃는 자가 돼야 하는 거야. 자, 최후에 웃는 그 날을 위하여 건배!”(「꿈 많은 소년의 새로운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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