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상현 조이소아병원장 |
옛 고구려 비사성의 자리에 위치한 대련시는 인구 약 300만에 주변 도시까지 합하면 약 600만의 인구가 밀집해 있는 곳이라고 한다.
대전에서 인천공항까지 3시간, 출국 수속에 2시간을 허비하였는데 정작 비행시간은 50분밖에 되지 않았다. 한국을 위시하여 세계 각국의 큰 기업들 특히 일본의 기업들이 많이 들어선 곳이라고 한다. 공식적인 행사 뒤에 현지 중국인 의사들의 말에 의하면 한국에서 걱정하던 혐한은 이곳에선 찾아 볼 수가 없었다. 한국 드라마를 즐겨보고, KBS방송이 방영되는 이곳은 한국에 대해 매우 우호적이었다. 분유 사건으로 중국 정부에서는 무료 검진을 시행하고 있었는데 새벽부터 아기들이 몰려와서 병원은 다른 진료를 못할 정도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고 의사들은 얼굴에 피곤함이 역력하였다.
대체로 의료 수준은 한국보다는 뒤지는 것 같았지만 젊은 의사들의 열의는 대단해 보였다. 아직 영어가 서툴고, 장비가 부족하고, 문헌이 많지 않은 것 같았으나 무엇보다도 대전 보다 좀 부족하다고 느낀 것은 전체적인 시민 의식이라고 할까? 중국에서 생산한 유명 외제 승용차들이 즐비한 가운데 가끔은 현대, 기아차도 볼 수 있는 것이 좋았다.
내가 충남 의대 교수 시절에 의과대학에 유학와서 박사학위를 따고 돌아 온 조선족 의사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조선족 동포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약 5만여명이 대련시에 산다고했다. 대련역 앞에는 한국 상품 및 음식을 파는 대형 마트가 있었는데 그곳에서의 육개장 맛은 한국과 똑같았다.
이 조선족 의사들은 한국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으며 본인들이 조선민족임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고 또한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곳이 옛 고구려의 비사성 자리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었으며 서울의 일기예보가 중국의 일기 예보보다는 좀 더 정확하여 한국방송의 일기예보를 본다고했다. 중국 북방의 도시들 가운데 가장 돈이 많고, 개방된 도시의 하나라고 하는데 아파트 약 30여평 짜리가 2~4억을 홋가 한다니 대전보다 더 비싼 것 같았다.
도심에 공원이 많았고 곳곳에 경찰이 있어서 인지 밤늦게 까지도 사람들이 많았고 치안이 잘 유지되는 것 같았다. 다음날 병원에서 배려해준 현대 승합차를 타고 압록강 하구의 단동시로 향했다. 고속도로는 시원스레 뚫렸으나 왕래하는 차량은 별로 없었다. 약 300Km를 달리는 동안에 휴게소가 한 곳밖에 없었고 넓은 지평선엔 옥수수 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가끔씩 고속도로에 행인이 있었고 어떤 농부는 고속도로를 가로 지나가고 있었다.
이 광활한 대지에서 그 옛날 고조선에서 고구려, 발해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조상들이 말 달리던 모습을 잠시 상상해 보았다. 영원한 주인도, 영원한 제국도 없다는 말이 새삼 실감이 나는 순간이었다. 압록강에 가까워지자 드디어 논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는 조선족이 주변에 있다는 표시이가도 한 것이다. 8년 전 두만강 지역의 도문에 갔을 때는 배고파서 강을 건너온 북한의 어린 형제를 보고 눈물이 난 적이 있었는데 오늘은 이곳 중국인의 말에 의하면 금년도 신의주지역에서는 감자 농사가 잘 되어 먹을거리 때문에 강 건너 오는 경우는 없는 것 같다고 하였다.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유람용 보트를 타고 신의주 쪽 강 언덕 바로 아래까지 가 보았고 북한 주민들이 일하는 모습도 보았다.
넓디넓은 압록강 하구의 북한 쪽은 너무 초라하였다. 강 건너 중국 쪽은 수십층 아파트 또는 상업용 건물들이 즐비하게 강을 따라 서있는데... 일제시대 때 세운 압록강 철교는 한국전쟁 때에 끊긴 채로 서 있고 6년 뒤 다시 세웠다는 다리 가운데에는 북한군 초소가 서있었다. 돌아오는 내내 씁쓸한 기분에 우울 하였다. 저 멀리 다시 뿌연 매연에 휩싸인 대련시의 공업단지인 개발구가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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