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양희 대덕구 읍내동 |
자라면서 돈을 빨리 벌고 싶었는데, 지식과 기술이 부족하여 하나도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81년 23살의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하였답니다.
시집을 잘 갔다고 소문은 자자했지만 허울만 좋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출근하면 수출 뜨개질도 하고 유도복 바느질, 폭죽 만들기 등 많은 부업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남편이 싫어해 낮에만 하다 보니 금액이 얼마 되지 않아 그만두고, 서른살 초반에는 우울증에 힘들었고, 과민성 신경대장증상으로 10여년 넘게 고생을 하였으며, 감기증상으로 병원 치료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낫지를 않아 몇 달 뒤 남편과 함께 병원을 찾아갔는데 의사선생님께서 정신과 입원을 권했습니다.
그때 전 정신이 번쩍하는 걸 느꼈습니다. 너무 억울하고 허무해 스스로에게 다짐을 했지요. 누구도 의지하지 않고 내가 누구인지 내 자리가 어딘지,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 내 힘으로 해보리라고.
찾기 시작 했죠. 못 배운 설움부터 해결해 보자고 충청주부학교에 입학을 하였습니다. 이때부터 남편은 “나보다 더 배워서 뭐하려고 그러냐?”며 시도 때도 없이 책을 다 버린다고 해 무척 싸웠답니다.
공부를 하면서도 저는 살림하며 가정도우미로 틈틈이 일해 학비를 충당했고, 남편의 불만을 사지 않으려고 가정에 더 충실했습니다.
온갖 궂은 일로 남편을 부끄럽고 자존심 상하게 한다고 많은 질타를 당하였지만 어떤 일을 하든지 성실과 근면하게 임하려고 노력하였으며, 제가 맡은 일은 끈기를 갖고 유종의 미를 거둘 때 까지 최선을 다해 생활한 덕분에 재학 2년 동안 봄 소풍도 가고 즐겁게 학교생활을 한 끝에 검정고시로 중·고등부 자격을 취득하고 졸업을 했습니다. 대학도 가고 싶었는데 시어머니가 병환 중에 있고 아들과 딸이 대학에 가게 되어서 내 나이 육십이 되면 다시 도전하기로 하고 공부는 그만 접었습니다.
공부를 하며 바쁜 시간을 보낼 때는 몰랐는데, 아이들은 이미 커버려 제 손길이 필요 없게 되고 남편은 남편대로 분주해 또 다시 홀로 남게 되었습니다. 내 삶의 허전함을 채워야겠는데 힘든 일을 한 탓에 몸이 너무 아파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짜증이 늘다보니 부부싸움이 그칠 줄을 몰라 참으로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무엇인가 해서 시간을 쓰고, 남편으로부터 나를 독립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다가 개인택시를 하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열심히 가정살림하면서 우선 영업용택시를 했습니다. 개인택시를 하려면 무사고 경력 3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영업용택시를 주부가 한다는 것이 이렇게 어렵고 힘이 들 줄 몰랐습니다. 늦은 밤에 술에 취한 남자 손님을 모시는 일, 장거리 시외손님으로 인해 집안 살림이 엉망이 되어버린 일 등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드디어 3년 무사고 경력을 갖추고 7천여만 원이라는 돈을 주고 내가 바라던 개인택시를 샀습니다. 일부는 꾸준히 저축해온 돈으로 충당했고, 천만 원은 빚을 내어 해결했습니다. 이것만 갚으면 완전히 제 것이 된답니다.
늘 삶을 우유부단하지 않고, 삶의 태도가 명확한 사람이 되기 위해 뚜렷한 주관을 가지고 생활했습니다. 원칙을 세워 그것을 기준으로 생활하려고 노력하였으며, 제가 가진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자기관리가 철저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배문숙 기자 mo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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