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재 국악칼럼니스트 |
율곡(栗谷)선생이 어린 시절에 지었다는 ‘화석정(花石亭)’이라는 시이지요. 수려한 가을 풍광 안에 쓸쓸함이 배어있습니다. 외로운 달과 변방에서 날아온 기러기 때문일까요? 기러기가 외톨이면 더욱 처량합니다. 月是故鄕明(고향의 달이 더욱 밝네)라는 절창을 담고 있는 두보의 ‘月夜憶舍弟(달밤에 아우를 생각하며)’라는 시에 보이는 구절인 邊秋一雁聲(가을빛 띤 국경마을에 외기러기 소리 들린다)의 외기러기는 가족과 흩어진 시인의 참담한 외로움을 상징합니다.
한자어로 큰 것을 홍(鴻) 작은 것을 안(雁)이라고 부르는 기러기는 무리지어 다니는 철새입니다. 특히, 그 대오(隊伍)가 정연(整然)하기에 옛 사람들은 상하의 질서를 아는 남의 형제를 높이어 안항(雁行)이라고 불렀습니다. 줄 맞추어 나는 기러기들의 모습을 떠올리니 기억저편에 있던 동요가 따라옵니다. “달 밝은 가을밤에 기러기들이 찬 서리 맞으면서 어디로들 가나요...” 중학교 시절 가슴을 저릿하게 했던, 박목월 시 김성태 작곡의 ‘이별의 노래’도 귀에 들립니다.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그런데 기러기는 또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중국 한(漢)나라 무제(武帝) 시절 소무(蘇武)라는 사람이 사절로 흉노에 갔다가 그 곳에 억류된 일이 있었습니다. 19년 만에 한나라 사신이 소무를 풀어 달라고 요구했지만 흉노 측은 그가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사신은 기러기발에 묶인 소무의 편지를 받았다고 주장하여 소무를 구출할 수 있었지요. 이 고사에 근거하여 편지를 ‘기러기 글’이란 뜻의 ‘안서(雁書)’, ‘안찰(雁札)’ 혹은 ‘안백(雁帛)’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기러기는 ‘전달자’, 특히 ‘사랑의 메신저’로 노래 속에 자주 나타납니다. 여창지름시조 한 수를 들려드리지요. “기러기 산이로 잡아 정들이고 길들여서/ 임의 집 가는 길을 역력(歷歷)히 가르쳐 주고/ 밤중만 임 생각 날 제면 소식(消息) 전케 하리라.”
한편, 전통혼례 중 신랑이 신부의 집에 가서 행하는 예식인 친영(親迎) 가운데에 전안례(奠雁禮)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는 신랑이 가지고 간 기러기를 상 위에 놓고 절하는 예를 말하는 것인 데, 기러기가 등장하는 이유는 부부의 수복(壽福)과 자손의 번영을 하늘에 빌기 위함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부부금슬이 지극하여 짝을 바꾸지 않는 새이기에 평생의 부부화락(夫婦和樂)을 기원하기 위해서라고 말들을 합니다.
자식사랑도 유별나다는 기러기는 이래저래 인간의 덕목과 감정을 두루 갖춘 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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