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대양 사건 관련자들의 집단 변사 현장 |
1984년 5월께부터 서구 가수원동에서 ‘오대양’이라는 민속공예품 제조·수출업체를 설립해 운영해오던 박순자씨가 1987년 8월 16일께 5억 6000만원 가량의 채권 반환을 요구하는 채권자를 집단 폭행한 혐의로 충남도경에서 조사를 받기시작하면서 부터였다.
당시 이 폭행사건과 관련해 피해자의 신고를 받은 충남도경은 8월 23일께 관련자 16명을 구속해 조사를 벌이고 있었다. 박씨는 다음날 경찰에서 조사를 받던 중 갑자기 졸도해 성모병원에 입원해 있다 도주해 종적을 감춰버렸다.
그후 며칠간 박씨의 행적과 수사는 오리무중이었고, 8월 28일께 박씨가 직원들과 함께 용인 공장에 은신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 경찰이 이 곳을 급습, 회사 직원 49명을 연행했으나 박씨의 모습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날 한 직원에 의해 구내 식당 천장에서 옷가지 등에 손발이 묶인 채 질식사한 상태로 32구의 시신이 발견된다. 박씨와 박씨의 자식 및 친인척, 공장 직원들이었다.
당시 수사 결과 이 사건은 오대양의 대표이자 사이비 종교집단의 교주였던 박씨가 사업을 미끼로 신도 등으로부터 거액의 사채를 끌어들인 뒤 폭행사건으로 인해 전모가 드러날 것을 우려 도주했고, 용인공장 천정에 은신처를 마련해 피신해 있다 경찰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당시 공장장등을 시켜 신도 등을 교살하고 자신도 목을 매 자살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당시 사건의 중요한 단서를 쥐고 있을 것으로 추정됐던 오대양 총무과장 노모씨 등의 행방이 묘연해지면서 이들이 사망에 이른 정확한 경위 등 이 밝혀지지 않은 채 여러가지 의문점을 남기고 종결된다.
당시 ‘사이비 종교집단의 집단자살’로 세상에 알려진 이 사건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이유는 또 있었다. 사건 이후 정치권 배후설과 특정종파의 관련설 등이 끊임 없이 흘러나오고, 집단 자살인지 타살인지 등 갖가지 의혹도 제기 됐기 때문이다.
▲뒤늦은 관련자들의 자수와 갖가지 의문=그러나 갖가지 의혹과 의문만 남긴채 세상에 묻혔던 이 사건은 1991년 다시 세간의 관심을 모은다. 사건 이후 종적을 감췄던 오대양 관계자 6명이 경찰에 자수해 오면서 검·경의 재수사가 시작된 것.
수사 내용은 집단변사의 사인, 특정 종파로 흘러들어갔다는 의혹이 재기된 사채의 행방, 자수자들의 자수 동기, 의혹이 제기된 (주)세모 및 정치권의 관련 여부 등이었다.
그 해 8월 20일 대전지검이 밝힌 종합수사결과는 이랬다. 당시 사라졌던 총무과장 노씨 등 3명이 사건 이전에 계율을 어겼다는 이유로 살해돼 대전공장에 암매장된 상태였고, 이들이 끌어들인 사채가 170억대에 달했다는 것.
그러나 사인과 관련해서는 집단 자살이라는 당초 수사결과를 재확인 했고, 오대양의 배후로 지목됐던 종파인 구원파(기독교복음침례회)의 중심인물이자 5공의 비호속에 성장한 것으로 알려진 세모의 사장 유병언씨의 직접적인 관련성은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유씨가 자신과의 관련성을 불식시키기위해 오대양 관련자들이 뒤늦게 자수하는 과정에 개입했다는 정도였다.
결과적으로는 이때의 수사 결과도 큰 진전을 보진 못한 것이었으며, 아직까지도 여러가지 추측과 의문만이 과거 속 사건을 맴돌고 있을 뿐이다./이종섭 기자 nom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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