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뚱하게도, 유등천 좌안도로(태평교∼버드내교) 공사를 시작하면서 밑동이 잘린 버드나무를 보며 튀어나온 배고픈 철학이다. 유등천의 본성과 같은 버드나무를 벤 것에 대해, 1600만원이면 버드나무 40그루를 심는데 1억2000만원이나 들여 이식할 게 뭐냐면 할 말은 없다. 경제성 때문이라는 해명에 일리는 있다.
그렇지만 앞에서 심고 뒤에서 벤다는 것이 왠지 술어의 진술성이 불성실한 언어로 들리는 걸 어쩌겠는가. 잘려나간 버드나무는 나무그릇이나 땔감이 됐을지 알지 못하나 시민 가슴마다에 박힌 상징성은 어찌할 텐가. 아깝고 아쉽다. 개인적으로 한빛수목원에 배롱나무를 ‘내 나무’로 헌수한 것도 그런 일종의 화인(火印) 때문이다. 격렬했던 태풍의 흔적을 간직한 배롱나무를 환생시키고 싶기도 했지만 쓸데없는 헌수(獻樹) 경쟁으로 비치지 않을까 은근히 조심스럽다.
그래서 나무 심기에는 뚝딱 해치우는 한국식 공법을 적용하지 말아야 한다. 벌컥벌컥 마셔대는 커피와 낙조에 물든 잎을 완상하며 음미하는 커피 중 어느 쪽이 향긋한가. 속도 조절을 하며 납세자인 시민의 소리에도 귀기울여 한 그루라도 시민과 보다 친숙한 나무로 만들어야지, 성급히 도로를 파고 나무를 심은들 바람 깃들 만한 곳이 없다면 무용지물이다. 본성이 빠져 곁길로 새서는 안 된다.
제주도에 유도화길이, 영동에 감나무길이 있다면 유등천변에는 버드나무길이 있어야 한다. 버드나무 없이 버드내가 버드내이고 유등천이 유등천인가. 아,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었나? 붕어 안에도 붕어는 없다. 버드나무가 잘린 유등천은 고자와 맹자의 동양철학적 주제에 이어 인문학적 주제를 생각하게 한다. 어쨌거나 버드나무는 맹자와 고자도 못 바꾸는 유등천의 본성이다. /최충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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