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찬인 충남대 교수 |
어제 언니는 나에게 새로운 한국 친구를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영어를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말고’라는 말을 덧붙였다. 옆에 있던 WH 언니의 친구, 터키인 언니가 크게 동조했다. ‘응, 영어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은 싫어~!!’ 언니들은 알고 있다. 기숙사 식당에서 백인이나 혹은 영어를 쓰는 사람이 앉아 있으면 한국 학생들이 어느새 옆에 다가가 친근하게 영어로 말을 건다는 걸. 그러나 자신들은 애써 더듬거리는 한국어로 한국인들에게 말을 걸어도 한국인들은 끝까지 들어주지 않는다는 걸 그들은 알고 있다.
얼마 전 터키인 언니가 발표과제의 조장이 되었다고 했다. 난 외국인 학생들만 있는 조의 조장이 된 줄 알았더니, 한국인들이 언니에게 떠맡겨 얼떨결에 그렇게 되었다고 했다. 중간고사 기간에 언니는 시험공부를 하면서 이중 부담에 너무 힘이 들어 울곤 했다. 교수님의 설명은 이해할 수 없고 한국인 친구들에게 물어봐도 가르쳐주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교수님께 물어보라고 했지만, WH 언니에게 교수님은 어려운 존재다.
언니의 다른 친구들은 시험을 ‘상상’하면서 본다고 한다. 문제를 이해할 수 없어 그냥 아는 대로 쓴다고 한다. 이런 어이없는 상황은 비단 WH 언니뿐만 아니라 우리 학교에 있는 외국인 학생 전부가 그렇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중국인 언니는 나에게 ‘한국에서 한국어랑 전공을 배울 줄 알았다’고 말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어서 처음에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언니는 말했다. 한국에서는 한국어를 아주 잘하지 않는 이상 전공은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한국어를 조금 더 배워가는 걸로 만족해야 한다고.”
얼마 전 한 학생으로부터 받은 과제물 내용 중의 일부다. 다소 긴 인용문을 그대로 옮긴 것은 이 글의 충격이 너무 컸던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기에서 제기된 문제를 여러 사람과 나누고자 함이다. 이 글은 맹목적 국제화의 속도전에 편승한 대학사회 혹은 한국사회의 그늘을 여실히 드러낸다. 아울러 한국인의 배타성과 차별성을 담담하지만 신랄하게 보여준다.
각 대학에서 ‘글로벌’을 외치며 외국인 유학생 유치경쟁에 돌입한 지 몇 년 만에 한국의 웬만한 대학은 외국인 학생 수가 1000명을 넘어서고 있다. 교육과학기술부에서 평가하는 이른 바 ‘국제화지수’를 높이기 위해 많은 대학들이 무차별적으로 외국인 학생을 받아들인 결과다. 학교마다 차이는 있겠으나 이들을 ‘재원’이나 ‘노동력’으로 보고 유치하는 데에만 신경을 쓸 뿐, 이들의 한국어 구사능력, 학습수행과정, 복지, 인권 등의 문제에는 손을 놓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외국인 학생들의 대다수는 중국인을 포함한 아시아인들이다. 대학가의 음식점이나 ‘카페’, ‘바’에는 이들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모습을 쉽게 본다. 이들에게 말을 걸면 어느 대학의 어떤 수업이 어떻고, 한국인 학생들의 이기적이고 냉소적인 시선이 어떻고, 동`서양인을 대할 때의 이중성이 어떻고 하는 점을 쉽게 들을 수 있다. 각 대학의 국제교류나 외국인 학생 유치를 맡은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이들과 한번 대화해 보라고. 많은 문제를 파악할 수 있고 동시에 해결할 방법도 보일 것이다. 연례적인 외국인 축제나 명색뿐인 나눔의 장, 하루뿐인 문화교류의 마당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도 깨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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