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선종 우송대 총장 |
삶의 무게가 한 짐인 어깨위에 손녀딸을 무등 태워 산책을 나섰다.
“할아버지가 무등 태워줄까?”
“네, 할아버지 무등 태워주세요.”
손녀가 두 손을 활짝 펴들었다. 어서 태워달라고 두 손을 별처럼 반짝거린다. 신이 나서 덥석 안아 어깨위에 올렸다. 녀석도 신이 나서 깨춤을 춘다.
“할아버지, 인경이 무겁지요? 이제 내려요.”
“아니, 안 무거워. 인경이가 나비처럼 가벼워.”
나는 평소에 2ℓ들이 물 여섯 개 묶음을 들면서도 끙끙대며 힘을 주고, 20kg짜리 쌀부대를 들어야 할 때는 꾀를 부리며 아들을 불러댄다. 그런데 몸무게가 16kg 정도인 손녀는 새털처럼 가볍다. 그 애를 무등 태워 산책하는 길이 어찌나 신나는지 내 어깨에 깃털을 단 느낌이며, 어쩌면 커다란 등산 가방을 더 메고도 사뿐사뿐 걸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이게 사랑의 힘인가 싶다. 그러고 보면 현실에서 부딪히는 갈등이나 고난의 무게감도 생각하기에 따라 그 크기가 다르게 되지 않을까싶다. 부처는 ‘삶은 고해’라고 하지 않았던가? 세상에 태어난 이상 그 누구라도 삶의 짐 보따리를 지고 가야하는 것을. 기독교에서도 사람에겐 원죄가 있다고 하지 않는가? 원죄가 어떤 것이든 죄는 이미 삶의 시련이지 않은가.
삶을 꾸려가려면 누구나 종류가 다를 뿐 고통이나 시련이 있게 마련이다. 그 실제의 차이는 그리 크지는 않다고 본다. 다만 스스로 느끼는 크기의 차이가 다르게 되는 것일 뿐이지. 어떤 이는 66㎡(20평) 아파트에서 살면서도 264㎡(80평)에서 사는 이보다 크게 웃고, 또 누군가는 900cc의 경차를 타고도 3500cc의 수입차를 타는 사람보다 더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할아버지, 인경이 내려놓으세요. 이제 너무 무거워요.”
녀석은 좋으면서도 미안했는지 어서 내려놓으라고 한다. 더 태우고 싶은 마음을 접는다. 미련부리다가 도를 넘겨서 내일 온종일 묵직한 어깨로 나도 모르게 손이 자주 갈지도 모를 일이며, 며칠간 묵직한 어깨 둔통 때문에 원인모를 짜증이 일지도 모를 일이다. 적당히 조절해주는 세 살 손녀의 따뜻한 영특함에 감동받으면서 평소에는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라고 함부로 대해온 우리 어른들의 어리석음이 문득 부끄러워진다.
내 삶의 무게도 결국은 내 마음먹기에 따라 그 중량감이 달라지고, 또는 도저히 내려놓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중압감 중에는 어쩌면 내 헛된 욕심 때문에 그렇게 끌어안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모를 일이다. 또한 이웃 사람들과 어우르느라 짊어지고 있는 무게들도 내 마음먹기에 따라 훨씬 줄일 수 있을 것임을.
그래서 아버지는 언제나 나만 뼈 빠지게 힘들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아들아 너도 참 힘들겠구나?’하고 한번만 생각해보고, 아내는 가족 뒤치다꺼리와 시집살이에 나만 요 모양 요 꼴이라고 원망만 삼기보다 ‘남편 어깨는 얼마나 무거울까?’를 한 번 쯤 생각해보자.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각자 자신이 진 짐의 무게만 크게 느끼고, 상대방이 지고 있는 짐의 무게는 가벼울 것이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이 결국 자신의 삶의 무게감을 더욱 크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한다. 그렇듯 상대방도 힘들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내 삶의 무게감이 조금은 작아지고, 그러면 내 삶이 훨씬 넉넉해질 수도 있을 것임을 알아야할 것이다.
손녀를 보면 어여쁜 마음이 마구 쏟아져서 덮어놓고 해대는 ‘아이고, 예쁜 우리 공주 인경이네’하는 그 말을 정작 사십년 가까이 함께 고생하며 살아온 마누라에게는 왜 못했는지? 오늘 저녁엔 먼저 한 번 말해보리라. 사내 녀석이 점잖지 못하게라는 편협하고 권위적인 생각의 사슬에서 벗어나 말하리라.
“아이고, 여보 예쁜 내 마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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