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철모 충남도 부이사관 |
중국이 동북공정에서 주장하는 핵심사항은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부였고 수`당과 고구려의 전쟁은 중국내 內戰이다는 것인데 중국이 유네스코에 등재할 때 결정적인 실수가 있었다. 그들은 고구려(Goguryeo)의 명칭을 그데로 썼다는 것이다. 고구려는 기원전에 국가를 형성하여 700년 이상을 유지해온 왕국으로서 수왕조, 당왕조보다 훨씬 장구한 역사를 가졌기 때문에 고구려는 당나라의 지방정권이 아닌 한민족의 역사이고, 수`당과 고구려의 전쟁은 중국의 국내전쟁이 아닌 국제전쟁임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변에 3호묘와 4호묘가 있었지만 시간이 없어서 5호묘만 들아가 보았다. 이 무덤은 고구려의 귀족 무덤으로 추정되는 데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도가 4벽면에 각각 그려져 있었다. 이 고분의 벽화는 매우 가치가 있는 문화 유산인데 매일 수백명의 관광객들이 들어와 입김과 체온에 시달리면 오래가지 않아 훼손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공주 무녕왕릉의 경우를 거울 삼아 복사본을 떠서 보게 하든지 어떠한 보존 조치가 취해져야 할 것 같은데 우리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이니 참 답답하였다. 중국이 과연 고구려 유적을 어떻게 대하는 것인가. 민족감정을 야기하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파괴시키지는 않지만 내팽겨두고 서서히 쇠락되게 방치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다음은 고구려 첫 도읍지였던 졸본지역이 있는 환인시이다. 환인시에는 조선족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최근에 지은 아파트 지붕은 우리 한옥 기와집처럼 되어있었다. 졸본은 기원전 38년 주몽이 부여 대소왕자와의 갈등으로 부여국으로부터 도망가서 고구려를 세웠던 곳이다. 주몽은 환인시를 내려다 보고 있는 해발822 미터의 오녀산 꼭대기에 산성을 쌓았다.
오녀산성은 정상으로부터 200미터 정도 절벽이 90도로 깍아지른 천혜의 요새였다. 꼭대기 오녀산성은 남북으로 1500 미터 동서로 300여 미터가 되는 그렇게 넓지 않은 성이며, 가로 13미터 세로 5미터 정도의 제1궁전터를 비롯해서 3군데의 궁전터가 있는 데 현재는 주춧돌만 남아있다. 또한 한반도의 주택과 같이 온돌방에 거주한 흔적으로 구들돌이 남아있었다.
4박5일의 역사 탐방은 고구려의 기상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여정 내내 아쉬움과 분통을 금할 수 없었다. 역사는 항상 되풀이 되고 반복되는 만큼 언젠가 우리 민족이 다시 이 만주벌판에서 기상을 떨칠 기회가 올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내부의 통합이 매우 중요하다.
상대방을 인정하고 양보하고 타협하는 상생의 정치, 사회적 약자를 일으켜 세울수 있는 따뜻한 복지, 세계를 무대로 한 활발한 경제, 그리고 우리 역사문화의 소중함을 알고 자부심을 갖게 하는 교육등 이 필요할 것이다. 정조대왕 이후 세계사의 흐름을 보지 못하고 우리 내부의 반목과 대립으로 인해 우리의 주권을 잃어 버린 전철이 다시 되풀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 역사뿐 아니라 한때 중국대륙에 대륙백제를 세우고 해상제국을 건설했던 우리 지역에 있는 백제의 재발견을 위한 노력도 우리에게는 절실히 요구되는 소명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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