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태준 연극연출가.배재대 공연영상학부 교수 |
이쯤 되다보니 주위에선 걱정과 의혹의 눈길을 보내는 이도 있다. 그래가지고 몸이 당해내겠어? 언제까지 그렇게 살려고 그래? 하지만 난 누가 뭐래도 나의 2시간 40분을 충분히 즐기고 있는 편이다. 무궁화호를 새마을호로만 바꿔도 약 20분정도는 절약이 되겠지만(내가 사는 곳에는 KTX가 서지 않는다), 난 꿋꿋하게 무궁화호를 고집한다.
물론 나는 나의 ‘2시간 40분’을 공간이동에만 활용하지는 않는다. 유익하다고만 볼 수는 없지만 세상 사람들과 가까이 접촉하고 관찰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유익하다고만 볼 수 없다고 한 것은 그들 모두가 내가 바라는 모습으로만 다가오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이 소중하다고 한 이유는 그들 속에 내가 살아있음을 극명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기차에 오르면 난 독서를 한다. 거의 매일 반복되지만 여전히 기다려지는 시간이다.
나의 사랑스러운 무궁화호는 이후로 내게 1시간 반 정도의 독서시간을 보장해준다. 나는 그 시간 동안 주로 국내외 소설을 탐독하는 편이다. 요즘 난 발자크의 ‘골짜기의 백합’이라는 소설을 읽고 있다. 내가 타고 있는 무궁화호엔 유독 대학생들이 많다. 아마도 천안이나 조치원 근방의 여러 대학들이 그들의 목적지일 것이다. 내가 독서를 하는 동안 그들도 뭔가를 한다.
그 ‘뭔가’를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기엔 그들 모두에게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대개는 잠을 잔다. 가엾은 우리 대학생들. 원래 젊음이란 에너지의 수급이 원활하지 않은 시기의 어떤 불균형 속에서의 출렁거림 같은 것이다. 저들 중 깨어있는 자 대부분은 예외 없이 핸드폰을 움켜쥐고 있다.
저들의 눈은 뿌연 안광(眼光)으로 탁해져 있고, 저들의 손은 해파리의 촉수만큼이나 기민하다. 작은 LCD 창에서 생사를 거듭하는 불쌍한 문자들. 저들은 그렇게 읽을거리를 생산하고 소비해 버린다. 한 시간 내내.
나는 이제 학교에 가면 나의 학생들이 제출한 과제물을 읽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다지 기대를 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써낸 글 속에 그들은 없다. 그들은 그들이 인터넷을 통해 취합한 글조차도 제대로 읽지 않았을 테니까. 그 글을 앞에 놓고 한 마디 쏘아붙인다. “글 쓰레기 모아 오느라 수고했어. 네 컴퓨터 마우스한테 안부 전해줘.” 이내 머쓱해하는 모습을 보면 또 괜히 미안한 생각이 든다. 다음엔 예의상 협박에 가까운 충고를 해준다. “얘야, 옛날 선비들은 목숨을 걸고 글을 썼어. 실제로 글 잘 못써서 죽은 사람이 허다하단다.” 나의 착한 학생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힘없이 돌아선 그 학생은 잠시 후 내게 문자 메시지를 보낼 것이다. “교수님 죄송합니다. 다음엔 열심히 할게요. ^ ^; 사랑해요.”
그래, 얘들아, 나도 너희들을 사랑해. 그런 너희들의 순진함과 너희들의 건강함이 나의 읽을거리가 될 수는 없을까. 너희들은 오늘 어떤 댓글을 올렸니? 너희들의 블로그엔 또 어떤 예쁜 이야기들이 새로 태어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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