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사 베일 벗긴 역사적 쾌거로 나라가 들썩
하루만의 졸속 발굴은 역사의 오점으로 남아
▲1971년 7월 8일 고 김영배 당시 국립박물관 공주분관장 등 10여명의 발굴단이 무령왕릉 입구를 열고있다. <사진-공주박물관 제공> |
1971년 7월 9일 ‘1448년전 유물 50점 발견, 연구 열리자 모두 흥분’이란 제목으로 게재된 중도일보 기사는 천년의 세월을 잠자고 있던 무령왕릉의 발굴 소식을 세상에 전하고 있다. ‘패망한 왕국’ 백제의 찬란했던 역사가 긴잠을 깨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당시 이 역사적 발굴은 고고사학계는 물론 전국을 시끄럽게 뒤흔들었다. 1971년 7월 8일 역사적 발굴로 무령왕의 혼이 깨어나던 순간 발굴현장은 전국에서 몰려든 취재진과 구경꾼으로 북새통을 이뤘다.
며칠 전부터 진행된 사적 13호 송산리 고분군의 배수로 공사 중 이뤄진 우연치 않은 발견이었다. 능 한켠에 세워진 지석을 발견하는 순간 발굴단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 년륙십이세계(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年六十二歲癸)’. 백제 사마왕 즉, 25대 무령왕의 무덤임을 알리는 글귀가 선명하게 세겨져 있었다.
몰려든 인파로 인한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유물을 쓸어담듯 하루만에 뚝딱, 발굴은 다급하게 이뤄졌다. 모두 108종 2906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고, 무령왕의 금제관식 등 12점의 유물이 국보로 지정됐다. 발굴 당시 이 유물들은 일시적으로 서울로 옮겨졌는데, 지역주민들의 극렬한 반대와 시위가 이어지면서 다시 옮겨져 현재 국립공주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그러나 백제사의 베일을 벗기는 이 역사적 쾌거에도 불구, 당시의 발굴과정은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기록된다. 성급하게 진행된 이날의 발굴 과정은 졸속발굴이라는 오명과 함께 학계의 뼈저린 반성을 남겼고, 발굴자료의 미흡 등으로 깊이있는 연구가 진행되지 못하면서 상당수 무덤 속 진실이 다시 역사에 묻혔다.
훗날 이 역사적 발굴과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도 전해진다. 당시 김영배 공주박물관장이 산돼지에게 쫓기는 꿈을 꿨는데 다음날 무령왕릉이 발견됐고, 그 무덤 앞에 세워진 돌짐승이 바로 그 산돼지와 같은 형상을하고 있었다는 것. 또 발굴책임자였던 김원용 당시 국립박물관장은 다음해 뜻하지 않은 일로 가산을 탕진하고, 무령왕릉으로 가는 길에 차로 사람을 치는 등 잇따른 불운을 격게 됐는데 우연히도 ‘큰 무덤을 파면 액운이 따른다’는 속설이 맞아 떨어진 것이었는지 모른다고 회고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로부터 22년 뒤인 1993년 12월 23일 이번에는 부여에서 다시한번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백제의 유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백제인의 정신세계와 예술적 역량이 함축된 공예품의 진수로 평가받는 ‘백제금동대향로’가 장구한 세월을 뛰어넘어 원형을 그대로 간직한 채 그 찬란한 빛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것도 능산리 고분을 찾는 관광객을 위한 주차장을 만들던 그 곳에서 450여점의 유물들과 함께 말이다. 이 유물의 발견은 백제문화의 우수성을 확인시켜주고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됐으며, 현재까지도 백제사 연구에 큰 영향을 미치는 또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었다.
지난해에는 부여 왕흥사지 목탑터에서 금, 은, 동이 겹겹이 쌓인 백제시대 사리함이 발견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는 등 백제의 찬란했던 역사는 아직도 그 신비함을 모두 드러내지 않고 있다. 이완구 충남지사는 백제 혼을 되살리기 위해 2010년 ‘대(大) 백제전’ 개최 계획을 발표하고 패망한 백제 역사를 찾기 위한 야심찬 프로젝트를 진행중이다. / 이종섭 기자 nom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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