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택 문학평론가.목원대 대학원장 |
그는 또한 `시인은 인류에게 쓸모 있는 존재`라는 앙리 베르그송의 말을 인용하면서 자신이 실제로 겪은 고난 체험을 통해 이를 확인했노라고 고백하였다. 그의 잠수함을 예로 든 인상적인 고백은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실감을 더해주고 있다. 오늘날의 최신식 잠수함과는 달리,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구식 잠수함은 산소 농도측정을 위한 장치가 없었기 때문에 토끼가 그 구실을 잘 해냈다고 하거니와, 젊은 게오로규가 승선한 잠수함 속에는 토끼조차 죽어버린 관계로, 저도 모르게 자신이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것을 뒤늦게 알게 되자, 역설적이게도 그는 비로소 `시인이 왜 인류에게 유용한 존재인가`를 새롭게 깨달았노라고도 하였다.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는 한국민`이라는 표현만 가지고도 공포와 전율에 떨던 저 울분ㆍ허탈의 시대에, 게오로규는 이러한 사회에서 앞장서서 깊이 괴로워하는 한국의 시인ㆍ문인들을 향하여 위대한 작가는 한국의 선비처럼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는 사회의 부정고발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외쳤다. 그리고 그것이 진실이라면 죽는 한이 있더라도 글로 써야 한다고 하며, 그렇지 못하면 결코 위대한 작가일 수 없다고도 했다. 그는 자신이 진실을 글로 썼기 때문에 추방되었음을 자랑거리로 생각한다면서, 선비정신의 구현자인 동양의 군자(君子)가 위대함도 결국은 지상의 괴로움 속에서 이를 딛고 넘어서, 소망에의 집념을 버리지 않는데 있다고 하였다.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 이런 말을 건네주지 못하던 저 암울한 시대에 한 시인은 자신이 고뇌하는 시대 한 복판에 살았고, 또 그 사회가 병들어 있음을 체험하였기에 우리에게 깊은 공감을 선사할 수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와 같이 `더불어 고뇌하는 우리의 마음 바탕`을 형성함은 시각에 따라서 교육이 될 수도 있고, 정치가 될 수도 있으며, 때로는 종교ㆍ문학ㆍ철학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특히 예술과 철학은 같은 문화적 차원에서 접근방법을 달리하고 있을 뿐, 실상 고뇌를 초극하려는 지난한 길이자, 더불어 괴로움을 공유하므로 그 괴로움을 이겨내려는 공동체적 인식행위이기도 하다.
대체로 문제가 있음에도 그것을 은폐한 채 문제로 다루지 않을 경우에 문제는 더욱 불어나게 마련이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는 문제가 줄어들거나 문제없는 국면으로 전환해 버린다. 고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고뇌거리를 회피할 때 고뇌는 더욱 격화된다. 역설적이게도 고뇌는 고뇌를 통해서만 해소된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의 현대인에게 있어 진정한 고뇌는 고뇌거리가 있다는데 있지 않고, 실은 고뇌의 사실 앞에 눈을 감아 버리려는 데 있는 것이다. 고뇌를 고뇌로 삼기는커녕 이를 회피하려고 하는 안일 속에 있다고 할 만하다. 사태의 심각성을 대충 얼버무려 약화시킴으로, 고뇌를 고뇌하지 않으려는데 있는 것이다.
이처럼 모두가 고뇌하기를 꺼려하고 삶의 진정성(眞正性)마저 훼손돼 가는 이 시대에서 우리의 시와 문학은 시대의 괴로움을 더불어 괴로워하며, 아픈 상처를 건드려 척결하고 고발하는데 그 존재 의의와 사명이 있을 것이다. 시인과 철학자는 서로의 위상에서 고뇌의 소재를 밝히고, 고뇌할 것을 고뇌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문제는 고뇌와의 안일한 타협이 아니라, 고뇌와의 피투성이의 한 판 대결이다. 시대를 괴로워하는 시인만이 고뇌를 모르고 잠든 사람들에게 이를 가르칠 수도, 또 더불어 고뇌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상 `시인이 괴로워하는 사회의 병증`은 시인으로 하여금 괴로움에서 떠나게 하기 위한, 따라서 괴로워할 필요조차 없는 사회, 곧 새로운 소망의 세상을 건설하고자 기여하는데 있는 것이다.
요즘 전 지구적으로 번지는 금융위기나 개선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이 땅의 청년실업 사태를 목격하면서,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게오르규와 같이 현상을 넘어 본질을 투시하는 통찰력을 배워야 할 것이다. 가시 면류관을 쓰고 괴로워하는 예수의 얼굴에서 인류에 대한 사랑의 극치를 보는 사람은 기독교의 진리도 함께 읽어 낼 수 있으며, 한 시대를 처절하게 괴로워하는 시인의 엄숙한 모습에서 진실과 진리, 그리고 아름다움과 거룩함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포착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이 괴로워하는 병든 사회에서, 새삼스럽게 문인의 사명을 ‘잠수함의 토끼`라고 천명했던 게오르규와 그의 문학을 다시 떠올리는 소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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