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사건 다발 후 건널목 점검 등 사후약방문 처방
▲ 1969년 1월 천안역 열차사고 당시 모습.(출처-정부기록사진집) |
102열차 뒤쪽의 2등객차가 공중으로 튀어올라 그대로 3등객차 위를 덮쳤고, 사고 현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사망자 41명, 부상자 110여 명. 철도 개설 이후 충남에서 기록된 가장 큰 열차 사고였다. 아비규환의 사고 현장을 당시 중도일보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2개 열차에 탔던 2500여 명의 여객들은 비명에 뛰쳐나와 친지들을 찾느라 혼잡을 이뤘고, 포개진 열차에서 떨어지는 유혈은 연 3일간 내린 주위의 눈밭을 붉게 얼룩지어 놓았다.`
사고 당일은 시야를 확보하기 힘들 정도의 폭설이 쏟아지고 있었고, 기관사가 신호를 확인하지 못한 채 그대로 역으로 진입을 시도했던 것이 사고의 원인으로 지적됐다.
그러나 역시 근본적인 이유는 안전불감증이었다. 며칠 후 보도된 내용에 따르면 사고 당일 악천후로 인해 신호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고, 사고 열차가 바로 전역을 통과했음에도 연락이 이뤄지지 않는 등 기관사의 부주의로 돌리기엔 숱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며 기강해이와 안전불감증을 지적하고 있다.
안전불감증으로 인한 열차 사고는 이후에도 이어졌다. 1년여 후인 1970년 10월 14일 아산군 배방면 북수리 장항선 철도 모산건널목에서 서울 경서중학교 학생 78명을 태운 관광버스가 열차와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현충사로 수행여행을 다녀가던 학생들을 태운 관광버스가 일시정지를 무시하고 건널목에 진입, 서울발 장항행 열차에 치여 불길에 휩싸인 이날 사고로 버스에 타고 있던 학생 45명과 운전자가 숨지고, 33명의 학생이 화상을 입었다. 이 사고 역시 한국 철도사는 물론 현대사에 기록된 대형 참사 중 하나다.
당시 사고는 총체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우선 차량통행이 많은 곳이었음에도 3종건널목으로 방치돼 차단기도 없고, 건널목 간수도 배치돼 있지 않았다. 버스에는 정원을 초과해 학생들이 빼곡히 타고 있었고, 인솔교사들은 술에 취해 다른 버스에 몰려 탑승하고 있었다. 당시 부주의한 운전자는 물론 정원초과 단속을 방관한 경찰의 책임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 사고는 교통부가 긴급히 안전관리 대책을 마련하고, 대전철도국은 관내 건널목에 대한 일체 점검에 나서는 등 이후 안전조치를 마련하는 계기가 됐지만 사후약방문식 처방이 아닐 수 없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도 유사한 사고는 이어졌다. 충남에서는 1989년 7월 7일 논산군 연산면 관동리 호남선 철도 건널목에서 승용차가 열차와 충동해 6명이 사상했으며, 1991년에도 예산군 예산읍 신가리의 건널목에 승용차가 열차와 충동 탑승자 5명 전원이 사망했다.
2003년 5월 30일 대전에서도 안전불감증으로 인한 열차사고가 발생하는데 중구 오류동에서 철거 중이던 계룡육교 구조물이 붕괴되면서 아래를 지나던 새마을호 열차가 탈선, 승객 40여 명이 부상을 입는다.
안전불감증으로 인한 대형 참사는 안전 의식이 미미하던 과거의 일만이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회 곳곳에 만연한 안전불감증은 각종 사고의 원인이 되고 있다. /이종섭 기자 nom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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