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건강에 좋고 값싼 두 다리 동력이라며 만든 길이 과연 얼마나 활용되는가. 쉬운 예로, 본 논설위원이 정장 입고 땀에 절어 출퇴근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짙은 회의감이 몰려온다. 어제만 해도 비 맞고 누운 팥죽빛 자전거길이 아까워 부아가 치밀 지경이었다. 일전에 대둔산길을 따라 복수면 경계까지 자전거길을 가는 동안 오직 한 사람의 자전거 라이더를 만났다. 금산 지량리에 사는 김치중 서양화가가 그였다.
급기야 도로와 인도를 ‘다이어트’한 자전거길을 계획한다는데, 무제한적 확장공간이 아닌 적정공간 개념을 도입해야 할 것이다. 무조건 우대보다는 자전거도 안전문화에 길들여야 한다. 파리의 내로라하는 공공 자전거 벨리브도 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20년 무사고·무벌점 운전인 필자는 차로를 쌩쌩 달리는 자전거가 겁난다. ‘사이클링은 위험한가? 맞다. 그렇다. 죽는다고는 할 수 없지만 명백히 위험하다.’(로버트 허스트)
기계론적 세계론에 치우친 차량주의적 세상에서 자전거란 교통체증, 대기오염, 고유가에 맞선 일개 대안 교통수단이지 마법의 바퀴는 아닌 것이다. 수송분담율 확보는 홍성·예산 도청신도시라면 가능할지 모른다. 네덜란드인처럼 겨울에 시린 손 호호 불며 타겠다면 또 모른다. 무엇보다 삶의 아늑함을 접고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춥다는 순리에 순응할 일이다. 오존농도가 환경 기준치를 넘을 때의 자전거 타기가 천식을 유발한다는 복병도 헤쳐가야 한다.
한때 자전거는 속도감의 대명사였으며 편한 복장을 입어야 해서 여성해방의 상징이었다. 다신 그런 귀부인, 아니면 예전 말 탄 아낙네나 나귀 탄 선비의 멋스러움을 기대하는 건 환상이다. 자전거 활성화가 자동차와 보행자를 성가시게 내모는 네거티브 성격이면 안 된다.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에어컨 쏘이며 책상머리에서 줄 긋는 행정은 ‘갓 쓰고 자전거 타기’의 부조화를 부른다는, 기본적으로 자동차와 자전거는 문화가 다르다는 사실. /최충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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