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영진 본사 前 주필 |
그때 침통한 심정으로 폐간사를 쓰고 거리에 내몰렸던 필자는 지금도 그때 일을 잊을 수 없다. 중도일보는 폐간을 당하는 순간까지 ‘지역사회개발’, ‘신속정확’, ‘정론직필’을 사시로 내걸고 충청인의 반려(伴侶)로 중부권역 선두신문으로 성장 했다. 충청은행 설립, 서산 ABC 지구간척, 충무체육관 건립, 계룡산 국립공원, 정부청사 대전유치(3청사)를 이끌어낸 것도 그때 일이었다.
작금은 김원식 사장의 주도하에 신사옥을 마련, 쾌적한 환경에 사원복지를 줄기차게 추진하는 한편 ‘서해시대’와 지방분권, 행정도시, 대전과학도시, 백제권개발 등을 외치고 있다. 신문은 이제 ‘선구자(Pioneer)’라거나 ‘지사(志士)’, ‘제왕’이 아닐뿐더러 영상매체의 발달로 독주가 어렵다는 지적이 줄곧 뒤따랐다.
아사히 신문 ‘천성인어(天聲人語)’의 필자 후카시로(深代郞)는 TV가 등장할 때 신문은 종을 치는 줄 알았다고 말한 일이 있다. 그러나 방송은 속보성으로 신문은 기록성이라는 장점으로 해서 양자는 공존을 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 예단한 일이 있다. 그리고 신문을 평할 때는 으레 중앙지와 지방지의 차별과 발행부수에 무게를 얹는 경향이 있지만 한자문화권이 유독 더하다.
발행부수가 반드시 신문의 신뢰도와 품질을 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일본의 시즈오카(靜岡) 신문은 인구 60만이 사는 소도시에서 발행된다. 그러나 1백만 부를 뛰어넘은 지(1979) 오래인데 그 무렵 우리 중앙지들은 무가지(無價紙)를 뿌리며 100만부 돌파운동을 펼칠 때였다. 그렇다고 시즈오카 신문이 서울 중앙지에 우선하는 것은 아니고 50만부 선의 프랑스 르몽드지에 앞선다고 평할 사람은 없다.
또 한 가지는 권력은 하나 같이 신문(언론)을 싫어한다는 걸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신문 없는 정부 보단 정부 없는 신문’ 쪽을 택하겠다고 외친 것은 제퍼슨 이었다. 하지만 막상 집권하고 나선 역대 그 어느 대통령보다 신문과 불화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로 전해온다. 명사들 역시 거의 그 반열에 낀다는 게 중론이다.
『파우스트』의 저자요, 4대 시성의 한 사람 괴테 도 신문기자를 보면 닭살로 변하는 체질이었다. 신문이란 ‘가장 쉽게 부식하는 상품’이니 24시간 후면 휴지통에 들어가는 폐품이라 매도했다. 한발 더 나아가 기자와 평론가는 ‘달리는 말꼬리에 매달린 파리’라 폄하한 일도 있었다.
요즘은 세칭, 보수·진보 신문이 일상 상반된 주장을 되풀이하는 바람에 독자들을 혼란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마치 나부(裸婦) 그림을 놓고 에로냐 예술작품 이냐는 논쟁만큼이나 치열해서 수수로워질 때가 있다. 선진국 신문은 상업주의에서 출발했다지만 한국 신문은 태동 배경부터 서구신문과 다른 점을 엿볼 수 있다.
한민족의 개화[開港]는 일제침략과 맞물려 한국 신문은 한 가닥 강성인자(强骨因子)를 지녔다는 지적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여명기는 그런 뜻에서 개화의 길잡이요, 다른 측면에선 ‘항일’ 그 자체에 의미를 두었다는 뜻이다. 가산을 팔아 신문사를 설립하고 기자들은 봉급 없이 뛰던 시절, 그것은 선구자요, 지사일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엔 무관의 제왕 이나 울트라의 개념은 퇴조하고 슬기로운 전달자 이길 바라는 추세 앞에 신문은 놓여 있다. 기자도 애국자이기에 앞서 슬기로운 전달자이길 요구한다는 뜻이다. 바꿔 말하면 기자도 생활인이며 가장(家長)이라는 걸 강조하는 세상으로 변해있다는 논리다.
그래서 급여와 복지 때로는 휴게 공간 등 근무여건을 따지는 세상이다. 요즘도 지방지에선 주독지냐 병독지냐의 선택을 놓고 고민하는 경우가 있지만 지방지는 지방지색깔을 내는 게 옳다는 뜻이다. 지구촌이 시차생활권에 묶여 있다 해서 세계 쪽으로 눈을 돌리려는 경향이지만 지방지는 지방뉴스 발굴에 치중하고 또 대변하는 게 순서라 하겠다.
21세기, 오늘의 사회 그 광장에선 집단소요, 이념의 대결, 이해당사자간의 갈등, 직선과 곡선이 뒤엉켜 도처에서 파열음이 터져 나오고 있다. 그 바람에 신문의 역할은 한층 더 절실해지는 계절에 접어들었다. 이에 중도일보는 파당과 다중(多衆)은 물론 소수의 목소리도 등한시하는 일 없이 진지하게 접할 것이다.
때로 난마처럼 뒤엉킨 상황에선 냉철하게 ‘노맨스랜드(Nomansland)’ 구실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신문은 원래 고객의 창조(創造) 라는 점에 유의, ‘찾아가는 신문’이길 거듭 강조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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