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태준 연극연출가.배재대공연영상학부 교수 |
원래 본질이란 쉽게 훼손되지 않는다. 본질의 세계에서 상처는 고통이 아닌 재생의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근대 이후 스물아홉 차례 개최된 올림픽의 역사가 그걸 입증해주고 있다. 전쟁과 테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정치적 보이콧의 악순환 속에서도 인간 승리의 드라마는 결코 멈춘 적이 없다. 나라 잃은 슬픔을 안고서 42.195km를 내달린 손기정 선수, 펠프스 이전 올림픽 금메달 최다관왕이었던 마크 스피츠, 10점 만점의 체조요정 나디아 코마네치의 신화는 바로 그러한 질곡 속에서 탄생한 영웅담이었다.
상처 입은 국민은 영웅담을 그리워한다. 20년 전 서울 올림픽 때 우리가 그랬듯이 이번 베이징 올림픽을 개최한 중국인들의 감회가 남달랐던 이유다. 다만 영웅담의 터를 제공하기 전에 주인 스스로의 자부심이 전제되어야 한다. 아마 그들은 금메달 이상으로 그것이 간절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중국인들은 과연 중국인들만이 해낼 수 있는 전대미문의 개회식과 폐막식을 연출해냈다.
그것으로 그들은 170년 전 아편전쟁으로 잃었던 대중화제국의 자존심을 회복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동안 올림픽 개막식에서 무수한 ‘역사’를 보아왔지만, 과연 그 어느 것이 이들의 역사에 필적하겠는가. 그들의 유구한 역사와 그 스케일에 비한다면, 아편전쟁 이후의 수난사는 그야말로 막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올림픽 개막식이 끝난 후 그 화려함에 압도된 어느 네티즌이 관련기사에다 이런 댓글을 달아 놓았다. “다음 올림픽 개최지가 런던이던가? 영국 애들 기죽었겠네. 어떡하냐?” 이건 참 아이러니다. 다음 올림픽 개최지가 영국이라니…. 이것도 베이징측이 사전에 충분히 계산에 넣었을 거란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이쯤 되자 4년 뒤가 너무 궁금해진다. 그러나 폐막식에서 본 소박한 예고편을 보면서 나의 조바심은 생생한 기대감으로 바뀌고 말았다. 나는 거기서 과거시제형의 거대한 역사가 아닌 진행형의 역사, 부단히 진화중인 또 하나의 역사를 보았다.
세 대의 자전거와 빨간 이층버스, 런던시민의 일상을 보는 듯한 인간 군상과 다소 무질서해 보이는 브레이크 댄스, 별로 자랑거리가 못될 것 같은 영국 기후의 상징, 우산! 그리고 진행형의 역사, 진화중인 역사, 바로 그 역사의 정점에 왕년의 전설적인 록밴드 레드 제플린의 기타리스트 지미 페이지가 섰다.
인생의 무상함과 젊음의 추억, 그 아찔한 갈등의 감회를 관통하는 40년 전 히트곡 ‘Whole Lotta Love’. 5000년 역사의 장대한 바다 한 가운데서 듣는 64세 노(老)기타리스트의 가장 요란한 러브송. 2008년 여름 베이징과 런던은 거기서 그렇게 만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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